[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38>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4년 4월 28일 19시 01분


코멘트
석 줄만 남은 法 ⑧

궁궐 안도 사정은 비슷했다. 높은 관을 쓰고 패옥을 늘어뜨린 채 궁궐 안을 활보하던 조정 대신들은 다 어디 갔는지, 눈치 보는 재주만 남은 늙은 환관과 궁녀들만 전각 이 구석 저 구석에 웅크리고 숨어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살피고 있었다.

패공은 장졸들을 거느리고 전각(殿閣)과 궁실(宮室)들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궁궐 밖에서 시황제의 행차가 보여주는 위엄과 영화는 본 적이 있지만 궁궐 안의 호사와 부귀를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여기 저기 늘어뜨린 휘장은 번쩍이는 비단이요, 구석구석 놓인 집기와 장식들은 하나만 집어가도 천금(千金)과 바꿀 만한 보물들이었다.

전각과 궁실(宮室) 사이를 옮겨가는 동안에도 패공의 물욕을 자극하는 것은 많았다. 마구간에는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명마(名馬)라 할 만한 크고 건장한 말들이 들어차 있었고, 또 다른 우리에는 좋은 사냥개들이 방금이라도 사냥을 떠날 채비를 하고 기다리는 듯했다. 모두 건달 시절의 패공이 부러워하며 가지고 싶어 하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패공의 가슴을 설레게 한 것은 궁궐 여기저기서 마주치는 여인들이었다. 이세황제가 죽고 공자 자영(子영)이 새 왕으로 들어선 일이며, 다시 실권자인 조고의 삼족이 몰살당하고, 초나라 군사가 함양을 에워싼 게 모두 석 달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눈치 빠르고 잽싼 궁녀 몇은 궁궐을 빠져 나가기도 했지만, 나머지 궁녀들은 거의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궁궐 안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출생 신화가 암시하는 핏줄의 분방함 때문인지 패공의 호색(好色)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건달로 저잣거리를 떠돌던 시절부터 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동안에도 여자들과 즐기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방금도 패공의 군막에는 잠자리를 시중들 여자가 서넛 들어 있었다.

하지만 한 푼 없는 건달로 저잣거리를 떠돌 때뿐만 아니라 수만명의 군사를 거느린 그때까지도 패공의 품에 드는 여자들이란 게 뻔했다. 저잣거리의 값싼 창기가 아니면 난리를 만나 생계를 잃고 몸을 팔아 살게 된 유민(流民)의 아내나 딸이었다. 거기다가 이때나 저때나 늘 여색에 허기진 듯 지내온 패공도 더운밥 찬밥을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런 패공의 눈에 궁궐 안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다듬은 궁녀들은 하나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仙女)같았다. 보는 눈만 없으면 모두 한 방에 몰아넣고 한바탕 흐드러진 방사(房事)나 벌였으면 싶었다. 특히 궁궐 후원의 한 전각에서 만난 한 무리의 어린 궁녀들은 패공의 가슴을 설레게 하다못해 눈앞이 아뜩한 느낌까지 주었다.

그날 늦게 패공이 무심코 군사들을 시켜 어떤 전각의 방문 하나를 열게 했을 때였다. 패공은 그곳에 몰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앳된 궁녀 여남은 명을 보고 잠시 숨이 막혀 허덕대다가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어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어찌해서 여기 이렇게 몰려 있느냐?”

그러자 그들 가운데 섞여 있던 나이든 궁녀 하나가 나서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 이문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