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시각장애 부부의 딸 ‘다를것 없는 성장기’ 펴내

  • 입력 2004년 4월 18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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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못 보는 몸으로 4남매를 훌륭히 키워낸 지인자씨(왼쪽)와 박흥식씨 부부가 손자 은진(가운데)의 재롱에 즐거워하고 있다.  -사진제공 정한PNP
앞 못 보는 몸으로 4남매를 훌륭히 키워낸 지인자씨(왼쪽)와 박흥식씨 부부가 손자 은진(가운데)의 재롱에 즐거워하고 있다. -사진제공 정한PNP
어릴 적 언제부터인가, 딸은 깊은 밤중이면 자신과 형제들을 쓰다듬는 두 사람의 손길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코끝부터 발가락까지. 뛰다가 무릎을 깨지는 않았는지, 더러운 곳은 없는지…. 시각장애인인 엄마와 아빠였다.

“바지가 껑충해지도록 자란 딸의 다리, 사람들이 잘생겼다 칭찬하는 작은아들의 훤한 얼굴, 그 모두를 두 분은 꼼꼼히 살피셨다. 두 분의 손끝이 지켜주는 사랑 안에서 우리는 무럭무럭 자랐다.”

주부 박명화(朴明花·35)씨가 앞 못 보는 부모 아래서 보낸 시간을 책 ‘엄마의 행복’(정한PNP 펴냄)에 담았다. 앞을 보는 사람보다 더 수완 좋다고 칭송받아 온 부모님의 농사꾼 생활, 엄마가 회상하는 꿈도 한숨도 많았던 신혼일기, 4남매의 성장기 등 애틋한 사연이 책장 가득 담겼다.

“엄마는 항상 살아온 얘기를 책으로 쓰고 싶다고 말씀하시곤 했죠. 나온 책을 읽어드렸더니, ‘야, 내가 들어도 드라마 같다’고 즐거워하셨습니다.”

아버지 박흥식(朴興植·61)씨와 어머니 지인자(池仁子·60)씨는 60년대 점자학원에서 만났다. 경기 양평군에서 농사일을 시작한 두 사람은 앞은 못 보지만 농사에는 곧 훤해졌다. 때로는 호미 쥔 손 위로 뱀이 스르르 지나가곤 했다.

부지런한 아버지는 마을 일대를 발끝으로 돌아다니며 익힌 감각을 이용해 우물 파는 일로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소를 길러 한때 재산도 제법 일궜지만, 정미소를 인수한 뒤 흉년이 들어 빚더미에 오르기도 했다.

“한번은 동생이 밤길에서 자꾸 발을 헛디뎌 부모님의 걱정이 컸어요. ‘쟤도 못 보게 되는 것 아니냐’고요. 다행인지 비타민 결핍 때문에 야맹증이 생긴 거였어요. 한걸음에 한 달치 영양제를 사오시던 아버지의 한숨이 지금도 생생하죠.”

자식들이 업신여김을 받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두 사람의 자존심은 꼿꼿했다. TV 보러 간 다른 마을 친구 집에서 ‘발 더럽지 않냐’며 마루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는 말을 듣자 부모는 이내 TV를 들여놓았고, 앞 못 보는 부부의 집이 마을 최초의 TV 있는 집이 되기도 했다.

“앞을 못 보는 사람도 사는 것은 똑같죠. 마음은 오히려 더 깨끗하고 건강할 수 있어요. 엄마는 그릇 하나를 사도 색깔까지 물어보시죠. 옷도 얼마나 색을 잘 맞춰 곱게 입으시는데요. 바쁜 자식들을 위해 손자까지 차례로 길러내셨어요.”

시집가서 인천에 사는 저자는 책에 “나는 이제 엄마의 지팡이가 아니지만 엄마는 지금이나 그때나 나의 지팡이다. 너무나 의지해서 없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결코 놓고 싶지 않다”고 적었다.

부모님과 함께 사진 찍기를 권하는 기자에게 그는 “책의 주인공은 부모님일 뿐”이라며 한사코 손을 저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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