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임채청 칼럼]함성이 법이라면…

  • 입력 2004년 4월 6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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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마지막 12시간을 그린 외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그냥 종교영화로만 와 닿지 않는다. 막무가내로 예수의 피를 원하던 2000년 전 예루살렘의 비극이 먼 나라의 옛일 같지 않아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무도한 이민족의 가혹한 법령이 아니라, 완악한 동족의 증오에 찬 함성이었다. “주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르나이다”라는 예수의 외침은 지금 우리에게도 울림이 있다.

▼‘우매한 저들’은 누구인가 ▼

종횡으로 찢긴 한국 사회에서 오늘날 ‘우매한 저들’은 정치노선에 따라 상반된 의미를 지닌다. 보수진영은 진보진영을, 진보진영은 보수진영을 각각 ‘저들’이라고 지탄할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저들’이 따로 없이, 양 진영 모두 자신들이 하는 짓을 모르는 게 작금의 국가적 불행일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민중혁명론이나 군사쿠데타론과 같은 헌정 파괴적인 주장까지 입에 담을 리 없다.

이는 둘 다 위험하다. 우리가 어렵게 얻어내고 힘겹게 키워온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를 다시 역사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중의 함성이 헌법”이라는 혹자의 주장도 정치적 수사의 범위를 벗어났다. 함성이 법이라면 선거도 재판도 필요가 없다. 함성이 갈라지면 법도 갈라지는지 의문이다.

또한 함성은 쉬 변한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 열광한 군중이나 골고다로 끌려가는 예수를 조롱한 군중이나 한 얼굴이다. 따라서 언제든 환호가 분노로 바뀔 수 있는 군중의 함성에 의존하는 국가경영은 위태롭다. 그게 가변적인 여론과 권력의 오류를 줄이기 위한 ‘법의 지배’를 근대헌법의 기본원리로 삼는 이유다. 그 법은 함성이 아니라 약속이다.

언론출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도 공론 형성과 권력 감시를 위한 것이다. 요즘처럼 공동체가 표류하고 있을 때 더욱 강조되는 언론의 기능은 국민의 공감대에 바탕한 공론 형성이다. 이를 위해선 극단적이고 난폭한 주장부터 걸러내고 순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신문의 날인 오늘 언론의 사명을 되돌아보기 두려울 정도로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너무 어지럽다.

100여년 전 상황이 자꾸 대비된다. 최근 한 논문에서 독립신문이 동학농민운동을 ‘야만의 행사’로, 황성신문이 의병운동을 ‘재앙’과 ‘돌림병’으로 표현한 사실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독립신문과 황성신문,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 모두 국권수호의 일념은 같았지만, 접근법은 그토록 달랐다. 이 같은 국론분열이 국망(國亡)을 불렀음은 물론이다.

현재의 보혁 갈등도 구조적 문제가 있다. 보혁의 대립개념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어느 쪽으로 규정되는 것도 원치 않는 사람이 많은 게 현실이다. 사안별로 보혁을 넘나드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목소리 큰 소수가 대결을 주도하면서 갈등을 부풀리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정치권이 있다.

신중한 다수는 보수가 잘못하면 보수를, 진보가 잘못하면 진보를 탓할 뿐이다. 그들이 분노하는 것은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이지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 이번 4·15총선은 이들에게 합당한 몫과 자리를 찾아줘야 한다. 하지만 각 당의 이념적 정체성이 불투명한데도 선거판은 오히려 정당대결 구도로 짜여지고 있어 전망은 밝지 않다. 여당 내에서 벌써 분당론이 흘러나오는 것도 심상치 않다.

▼총선 민의의 유효기간은?▼

1987년 민주화 이후 4차례 총선에서 표출된 민의가 4년 임기 동안 단 한 번도 온전히 유지된 적이 없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전철을 밟을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정당 대결은 의미가 없다. 깨지고 합쳐지고 뒤범벅될 정당에 표를 준들 얼마 가지 않아 그 민의는 배반당할 터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인물 대결이 정직하다고 할 수 있다. 각 당이 이합집산을 거듭해도 인물은 그대로이지 않겠는가. 이번 총선 민의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임채청 편집국 부국장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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