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05년 베토벤 영웅교향곡 初演

  • 입력 2004년 4월 6일 18시 51분


코멘트
“베토벤의 음악이 있었기에, 인간은 범속(凡俗)의 굴욕으로부터 궐기(蹶起)하게 되었다.”(릴케)

루트비히 판 베토벤. 그 쥐어짜는 듯한, 단단히 매듭지어진, 응결(凝結)된 표정을 보라. 그의 삶은 그의 음악이 그러했듯이 어둡고 격렬하다.

베토벤의 음악을 듣는 것은 ‘일’이다. 노동이다. 폭풍우 속을 뚫는 독수리의 그 힘찬 날갯짓은 한 인간의 고통과 불행의 소산이다. 청각을 완전히 상실한 만년에는 나무 작대기 한 끝은 피아노 위에, 다른 한 끝은 입에 문 채 이를 통해 음악을 느껴야 했다니.

180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初演)된 교향곡 3번 ‘영웅’.

이 장대한 곡은 귓병이 치유 불가능하다는 선고를 받고난 뒤 씌었다. 귀는 밤낮으로 윙윙거리면서 ‘절벽’이 되어가고 있었고 자살의 유혹으로 괴로워할 때였다.

영웅교향곡은 고전주의 음악의 ‘비약’이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 음악의 폭발적인 전복(顚覆)이었다. 관습과 규칙을 깨뜨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강력하고 완벽했다. 형식과 내용에 있어 종횡무진은 낭만주의 시대를 두드린다.

그는 이 곡을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 했으나 황제 즉위에 분노해 악보 표지를 찢어버렸다. 프랑스대혁명의 이상을 좇았던 그에게 나폴레옹의 배신은 참기 힘들었다.

“나의 예술은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에 이바지해야 한다.”

그는 스스로를 노동자로 여겼다. 자신의 악보를 팔아 생활했다. 그래서인가. 스탈린은 그의 교향곡 ‘합창’의 마지막 악장을 듣고 외쳤다. “이것이야말로 인민의 음악이다!”

베토벤은 천재가 아니었다.

3류 가수였던 그의 아버지는 ‘신동 베토벤’을 꿈꾸었으나, 그는 여덟 살이 지나서야 겨우 세 살 때 모차르트의 흉내라도 낼 수 있었다.

베토벤은 평생 여인을 갈구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간절히 결혼을 원했지만 미혼인 채로 생을 마쳐야 했다.

그가 숨을 거둔 뒤 그의 비밀서랍에서 수신인도 없이 검게 봉해진 세 통의 연서(戀書)가 발견된다. 그는 ‘그녀’를 ‘불멸의 연인’으로 불렀으나 그녀가 누구인지조차 세상은 알지 못한다.

이 위대한 음악가는 ‘절대 고요’의 생을 살다 갔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