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12>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4년 3월 18일 17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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覇上의 眞人(2)

“그 일이라면 걱정하시지 말고, 먼저 바깥에 있는 나귀에 실린 짐과 제가 데리고 온 사람을 안으로 불러들여 주십시오. 그런 다음 한(韓)장군과 경(耿)장군을 불러 주신다면 그 두 분을 달래는 일은 우리가 맡겠습니다.”

그리고는 나귀에 싣고 온 금은보화를 안으로 옮기게 하면서 아울러 육가(陸賈)도 불러들이게 했다. 주괴도 사람을 보내 부장(副將) 한영과 사마(司馬) 경패를 객사로 불렀다.

먼저 육가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역이기가 주괴에게 육가를 짤막하게 소개했다.

“여기 이 사람은 성이 육(陸)씨요 이름을 가(賈)라 하며 초나라 땅에서 나고 자란 선비입니다.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종자처럼 꾸미고 있으나, 실은 이 늙은이와 함께 막빈(幕賓)으로 패공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번에 이 늙은 것을 돕기 위해 이렇게 따라왔는데, 변설로 천하를 종횡(縱橫)하던 소진과 장의의 풍도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육가에게 슬며시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여기 이 주(朱)장군께서는 크게 의기를 내어 우리 패공의 뜻을 받들겠다 하시네. 그런데 수하에 있는 두 장수가 따라주지 않을까 걱정이라 하니 이제는 자네 언변을 좀 빌려야겠네. 잠시 후에 그들이 오거든 재주껏 달래 주장군의 걱정을 풀어드리게.”

“알겠습니다. 두 분 장군이나 불러주십시오.”

육가가 방안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대답하고는 날라 온 자루에서 금은과 보화들을 꺼내 탁자 위에 쌓았다. 금덩이 은덩이와 보배로운 구슬들이 저마다 잘 닦아둔 것이라 그런지 절반쯤만 꺼내 쌓았는데도 방안이 훤해질 만큼 번쩍거렸다.

“이는 패공께서 장군께 먼저 보내시는 정표입니다. 우리 대군이 일없이 이 요관을 지나게 된다면 다시 이번의 두 곱으로 보답을 하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뭐, 패공의 뜻을 따르는 까닭이 반드시 재물 때문만은 아닙니다. 진나라의 천명이 다했다니 새 주인을 찾고 있을 뿐입니다.”

주괴가 멋쩍은 듯 그렇게 우물거렸다. 육가가 재빨리 그 말을 받았다.

“패공께서도 한 줌 재물만으로 장군의 마음을 사시려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이 요관을 통해 함양에 이르고, 마침내 무도한 진나라를 쳐 없앨 수 있다면 패공은 장군을 상장군(上將軍)에 만호후(萬戶侯)로 올리겠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주괴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헤벌어지더니 마침내 뜻을 정한 듯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결연히 말했다.

“그렇다면 미력하나마 저도 패공을 위해 개나 말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거느린 장졸들과 함께 초나라 군사의 길라잡이가 되어 함양을 치고, 진나라가 망하는 걸 제 눈으로 보겠습니다.”

그때 주괴의 부장 한영과 사마 경패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장사치의 아들인 경패와는 달리 한영은 왕공(王公)의 후예라는 자부가 있었으나 재물 앞에서 약하기는 경패와 다름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탁자 가득 쌓여 있는 금은보화를 눈부신 듯 바라보았다.

“두 분 장군께서도 잘 오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육가가 마치 전부터 두 사람을 잘 알고 지내온 사람처럼 그렇게 말해놓고 자루에 남아있던 금은보화를 방 한구석에 놓여있는 다른 탁자 위에 주르르 쏟았다. 주괴에게 준 것에 못하지 않게 그 광채가 눈부셨다.

“이것은 패공께서 두 분 장군께 보내신 것입니다.”

한영과 경패는 어리둥절했으나 생각지도 않은 금은보화가 보따리로 굴러든 게 싫지는 않은 듯했다. 덥석 받지는 못해도 표정은 기껍기 그지없었다.

“이게 무엇이며, 패공은 누구요?”

짐짓 낯빛을 엄하게 하여 그렇게 물었다. 그들의 표정을 보고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는지 주괴가 육가를 대신해 물음을 받았다.

“패공 유방은 이번에 무관(武關)을 깨뜨리고 관중으로 드신 초나라 상장군이시네. 우리에게 이렇게 과분한 물품을 보내신 것은 함양으로 가는 길을 빌기 위함인 듯하네.”

그래놓고는 슬며시 한영과 경패의 눈치를 살폈다. 재물을 보낸 것이 패공 유방이란 것을 알자 일순 두 사람의 얼굴은 굳어졌으나 오래 가지는 않았다. 매섭게 뿌리치기보다는 어떻게 받아 넣을 길이 없을까 궁리하는 표정으로 경패가 주괴에게 물었다.

“장군께서는 어쩌시겠습니까?”

그때 다시 육가가 슬며시 끼어 들었다.

“장군들께서 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무관에서 보름이나 쉬면서 군량과 병장기를 갖춘 5만의 강병(强兵)이 관을 부수러 올 것입니다. 지난 겨울 탕군(탕郡)을 떠난 이래 세 태수를 죽이고, 한 태수를 사로잡았으며, 다시 두 태수의 항복을 받은 패공의 군사들입니다. 패공께서는 스물 한 개의 성을 떨어뜨리고, 다섯 개의 성을 싸움 없이 얻으셨습니다”

그 말을 받듯 주괴가 무거운 표정으로 경패와 한영을 보며 말했다.

무관은 관중을 지키는 네 관(關) 중에 하나로 세상이 다 아는 천험(天險)의 땅이었소이다. 거기다가 무관을 지키던 장수는 우리 진나라가 알아주던 맹장이요, 군사도 만 명이 넘었소. 하지만 패공이 한번 칼을 들어 후려치니 하루아침에 모두 도륙되고 말았는데 우리 요관은 어떻소? 지리도 무관만 못한데다 군사도 겨우 몇 천에 지나지 않소. 그나마 내가 함양에서 데려온 군사는 조련도 되지 않은 잡병(雜兵)이라 패공의 5만 정병이 이르면 앞일은 불 보듯 훤하오. 두 분 장군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래놓고 경패와 한영은 한동안이나 대꾸가 없자 달래듯 덧붙였다.

“비록 공자 자영이 조고를 죽이고 겨우 왕실을 붙들었으나, 이미 우리 진나라의 운세는 다한 것 같소. 옛말에 이르기를 시세(時勢)를 알아야 영웅이라 했으니 어떻소? 우리 이쯤에서 한번 시세의 흐름을 갈아타 보지 않겠소? 또 장부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는다 했는데, 패공께서 우리를 알아보시고 이렇게 예물까지 보냈으니 어찌 거절하겠소?”

경패와 한영도 패공이 보낸 사람들이 먼저 와서 퍼뜨린 소문은 듣고 있었다. 그 엄청난 대군이 몰려들면 끝내 요관을 지켜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가 많은 재물로 달래 오니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래잖아 두 사람이 한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저희들은 오직 장군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장군께서 패공을 따르시겠다면, 저희들도 창칼을 거꾸로 돌려 함께 함양으로 가겠습니다.”

결국 육가는 재물을 소진과 장의로 삼아 별로 말을 허비하지 않고도 두 사람을 달랜 셈이었다. 한영과 경패가 자신을 따라주자 기세가 살아난 주괴가 역이기를 보고 말했다.

“가서 패공께 전하시오. 우리 세 사람은 패공께 관문을 열어드릴 뿐만 아니라, 우리 군사들을 이끌고 함께 함양을 쳐 진나라를 무너뜨리는 일을 도울 것이오. 다만 일이 성사된 뒤에는 우리를 잊을까 걱정되니 미리 패공께 몇 가지 약조를 받아야겠소.”

그리고는 장사치의 자식답게 흥정까지 걸어왔다.

“장군께서 패공께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오?”

역이기가 어려울 것 없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받았다. 주괴가 한영, 경패와 잠시 수근거리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공이 있으면 천한 농군도 왕이 되는 세상이오. 만약 패공께서 진나라를 쳐부수고 천하를 얻게되면, 관중 땅은 우리 세 사람에게 내려주셨으면 하오.”

“내 패공께 아뢰어 반드시 장군들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겠소.”

역이기는 절로 코웃음이 나왔으나 억지로 참고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육가가 나서서 거들었다.

“함양을 치는 데 장군들이 앞장서 준다면 몇 백 리 땅 뿐이겠소? 세분 모두 왕으로 봉하여 대대로 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해드리겠소.”

그러자 세 사람은 더욱 입이 헤벌어졌다. 크게 잔치를 열어 역이기와 육가를 융숭하게 대접한 뒤에 패공 유방에게로 돌려보냈다.

역이기와 육가가 나는 듯 말을 달려 패공에게로 돌아가 요관에서 있었던 일을 전했다. 패공이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내 이번에는 창검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요관을 지날 수 있겠구나. 그렇게만 된다면 관중왕(關中王)은 바로 나다!”

그때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장량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그리 쉽게 보실 일이 아니 듯합니다. 패공께서는 오히려 급히 군사를 일으켜 오늘밤으로 요관을 들이치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선생 그게 무슨 말씀이오? 뇌물을 주어 적장을 매수하자고 하신 것은 선생이 아니었소? 그런데 이제 와서 군사를 쓰자니 어찌된 일이오?”

패공 유방이 알 수 없다는 눈길로 장량을 바라보며 물었다. 장량이 숨결 한번 흩트리지 않고 조목조목 그 까닭을 일러주었다.

“적장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 진나라를 저버리려 하고 있습니다만, 그 욕심이 지나쳐 걱정입니다. 금은 보화에 더하여 왕공의 작위까지 얻는 것은 한낱 궁벽한 산골 관(關)을 지키는 장수가 감히 바랄 바가 아닙니다. 그저 욕심에 겨워 사방을 둘러보지도 않고 마음을 정한 듯하니, 그 병졸들이 따라주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만약 병졸들이 그들을 따라 항복해주지 않는다면, 그들만을 믿고 관 안으로 들어간 우리가 자칫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그들이 마음놓고 있을 때 갑자기 들이쳐 힘으로 관을 빼앗는 것이 낫겠습니다.”

적을 헤아리고 꾀를 펼치는 데는 누구보다 밝은 장량이었다. 비록 적장을 두 번 속이는 독한 계책이지만 장량이 권하자 패공은 그대로 따랐다.

그날 밤이었다. 군사들을 이끌고 밤길을 재촉해 요관에 이른 패공은 삼경 무렵 갑작스레 관문을 들이쳤다. 그때 주괴와 한영, 경패는 저희끼리 흥에 겨워 주고받은 술에 취해 모두가 곯아 떨어져 있었다. 장수가 그 모양이니 병졸들이라 해서 굳게 관을 지키고 있을 리 없었다. 갑작스런 야습에 위아래가 모두 놀라 허둥거리는 사이에 관문은 깨지고 초나라 군사들이 물밀 듯 안으로 쳐들어왔다.

취해서 자다가 갑옷조차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온 주괴는 이내 일이 글렀음을 알아보았다. 곁에 두고 부리던 군사가 끌고 온 말에 올라 몇 번 칼을 휘둘러보다가 서북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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