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내가 읽은…' 그림이 말한다, 작가의 영혼을

  • 입력 2004년 2월 27일 17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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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미하엘 프레히틀이 토마스 만을 그린 잉크드로잉 수채화(1995년). ‘토마스 만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평에 있어서도 최고의 전문가였다. 누구도 그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라고 라이히라니츠키는 평한다. 테이블에 비친 인물은 만의 친구인 작가 요제프 폰텐. 사진제공 씨앗을 뿌리는 사람

화가 미하엘 프레히틀이 토마스 만을 그린 잉크드로잉 수채화(1995년). ‘토마스 만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평에 있어서도 최고의 전문가였다. 누구도 그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라고 라이히라니츠키는 평한다. 테이블에 비친 인물은 만의 친구인 작가 요제프 폰텐. 사진제공 씨앗을 뿌리는 사람

◇내가 읽은 책과 그림/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김지선 옮김/464쪽 1만8000원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2년 7월, 독일 문학계는 뜨거운 논쟁으로 들끓었다. 발단은 독일 문단의 대표주자 마르틴 발저가 발표한 장편소설 ‘어느 문학평론가의 죽음’이었다. 소설은 ‘악평에 분노한 작가가 평단의 제왕으로 불리는 유대인 문학평론가를 살해한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경악했다. 소설 속 ‘평론가’가 실제 인물인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84)를 곧장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라이히라니츠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으로 독일 공영방송 ZDF TV의 인기 문학 프로그램 ‘문학 4중주’를 14년간 진행한 실력자. ‘제왕’이라 할 만큼 문학계와 출판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때로는 작가들의 원한을 살 정도로 신랄한 악평을 퍼붓는 독설가다. 이미 1973년부터 그는 독일 최고의 정론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전속 문학평론가로 일하며 호오(好惡)가 분명한 특유의 직설적 화법으로 독일 문단을 좌지우지하는 존재였다.

이 ‘제왕’이 과거와 현재의 문화계 인물 40명을 이야기한다. 대부분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후의 독일 문학가들을 다루고 있지만 영국의 윌리엄 셰익스피어나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 등 외국 문호도 등장시킨다.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구스타프 말러도 각각 한 장씩을 차지한다. 책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이 마흔 명의 대가를 묶은 고리는 특이하게도 ‘그림’이다.

계기는 1967년 주간지 ‘디 차이트’로부터 선물 받은 극작가 겸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초상화. 이 선물을 계기로 초상화 수집에 취미를 붙인 라이히라니츠키에게 지인들도 초상화를 하나씩 선물하기 시작했다. 그의 집 벽은 이내 초상화로 가득 메워졌고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2001년 초상화를 곁들인 예술가 에세이 연재를 그에게 의뢰했다.

1년 3개월 동안 소개된 초상화는 69점. 왜 40명에 대해 69장일까. 비평가에게도 각별히 애착이 가는 작가가 있다. 유대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힘겹게 살아남았던 그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나를 지탱해 주었던 사람이 바로 하인리히 하이네와 토마스 만”이라고 토로한다. 하이네의 초상화는 7점, 만의 초상화는 10점을 차지한다. 때론 파리하고, 때론 당당하며, 때론 꿈꾸는 듯 보이는 하이네의 초상화에 맞춘듯 저자는 그의 면모를 슬픈 익살가, 사회적 변혁자, 사랑의 시인 등으로 다채롭게 묘사한다.

199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는 두 가지 면모로 등장한다. 극작가 막스 프리슈의 동판화 등을 제작한 ‘판화가’로, 또한 현대 독일문학의 새로운 장을 펼쳐낸 문인으로. 소설 ‘어느 달팽이의 일기’ 모티브를 제공받고도 입을 싹 씻는 그라스의 옆구리를 찔러 그의 판화 ‘수녀와 뱀장어’를 빼앗아낸 일화도 사뭇 흥미롭다.

이 책을 한층 더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것은 ‘그림이 있는 에세이’ 형식에 걸맞은 평이한 언어 속의 남다른 통찰이다. 예를 들어 브레히트는 ‘계급투쟁을 중시해서 서사극을 쓴 게 아니라, 서사극의 주제로 쓰기 위해 계급투쟁이 필요했던’ 작가로 묘사된다. 체호프? 그의 작중인물들은 대개 하찮은 얘기를 나누며 권태로워하는 것이 특징이다. 지루하지 않은 사람은 그의 독자들뿐이다. 생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말러와 프란츠 카프카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을 동경하고 갈망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한자리에 묶인다.

원제 ‘Meine Bilder:Portr¨ats und Aufs¨atze’(2003).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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