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고대로부터의 통신'…碑文에 천년역사 숨어있네

  • 입력 2004년 1월 9일 17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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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릉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탁본과 달리 비문에 종이를 대고 문자 둘레에 선을 그린 다음(雙鉤) 그 여백에 묵을 넣어(加墨) 탁본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사진제공 푸른역사
광개토왕릉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탁본과 달리 비문에 종이를 대고 문자 둘레에 선을 그린 다음(雙鉤) 그 여백에 묵을 넣어(加墨) 탁본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사진제공 푸른역사
◇고대로부터의 통신/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지음/412쪽 1만4000원 푸른역사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어느 날 장래를 약속한 남녀 한 쌍이 경북 경주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계곡을 찾아 오붓한 시간을 즐겼다. 사랑에 들뜬 연인들은 커다란 바위에 이렇게 사랑의 흔적을 남긴다.

‘을사년 갈문왕께서 놀러오시었다가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시게 되었다.…함께 놀러온 벗으로 사귀는 누이는 성스럽고 빛처럼 오묘하신 어사추여랑님이시다.’

이는 울산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있는 국보 제147호 천전리 각석(刻石·글이나 그림이 새겨진 돌)에 새겨진 글귀다. 천전리 각석은 높이 2.7m, 폭 9.5m의 평평한 바위.

연인들이 남긴 사사로운 낙서는 뜻밖에도 6세기 신라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을사년은 신라 법흥왕 12년(525), 갈문왕은 왕에 버금가는 최상급 신분으로 법흥왕의 친동생이다. ‘벗으로 사귀는 누이’라는 표현에서는 신라 왕실에서 근친혼이 성행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역사학자들은 그 후 이어지는 암호와 같은 짧은 몇 글자를 곱씹으며 갈문왕의 성격과 정치체제의 변동 양상을 더듬더듬 읽어낸다.

고대인들이 돌이나 청동 조각에 남긴 금석문(金石文)은 제목 그대로 ‘고대로부터의 통신’이다.

상상력이 풍부한 역사학자들은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글과 그림에 귀 기울여 한국 고대사의 빈 공간을 메워가며 역사를 복원해낸다.

1949년 중국 지린(吉林)성 육정산에서 발해 3대왕 문왕(文王)의 둘째딸 정혜공주의 무덤이, 1980년 지린성 용두산에서는 문왕의 넷째딸 정효공주의 무덤이 차례로 발견됐다.

‘보력(寶曆) 4년(777) 4월 14일 을미에 궁궐 바깥에서 죽었느니, 나이는 40세였다. 정혜공주라고 시호를 내렸다. 보력 7년(780) 겨울 11월 24일 갑신에 진릉의 서쪽 평원에 배장하였으니….’

‘대흥(大興) 56년(792) 6월 9일 임진에 궁궐 바깥에서 죽었느니, 나이는 36세였다. 정효공주라고 시호를 내렸다. 이해 겨울 11월 28일 기묘에 염곡의 서쪽 평원에 배장하였으니….’

길지 않은 공주들의 묘지명(墓誌銘)에서 역사학자들은 끝없는 질문을 끌어내고 해답을 찾아간다. 왜 정혜공주는 3년상을, 정효공주는 1년상을 치렀을까. 왜 문왕은 연호를 대흥에서 보력으로, 다시 대흥으로 바꾼 것일까. 왜 정혜공주의 무덤은 발해의 첫 수도에서, 정효공주의 무덤은 두 번째 수도에서 발견됐을까.

정혜공주 3년상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고, 정효공주 1년상은 후에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문왕은 즉위 38년째인 774년 연호를 대흥에서 보력으로 바꿈으로써 왕권 강화를 꾀했다. 그 과정에서 귀족 세력들은 반발했을 것이고 문왕 말기에 다시 대흥으로 연호를 고친 것은 이를 반영한 것이다. 두 공주 무덤의 위치가 다른 것은 좀더 복잡한 사연이 있다.

이 밖에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중원고구려비, 충남 공주시 금성동 무령왕비 지석(誌石), 일본 나라(奈良)현 텐리(天理)시 이소노카미 신궁(神宮)에서 발견된 칠지도(七支刀) 등 고대사를 다시 쓰게 한 금석문의 수수께끼 풀이가 이어진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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