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은령/세한독서(歲寒讀書)

  • 입력 2004년 1월 4일 18시 55분


코멘트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책들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몇 권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다. …백과사전이 불쏘시개로는 그만이라고 적극 추천하고자 한다.’

신년 벽두 영국 탐험가 어니스트 셰클턴 경이 백과사전에 바친 예찬을 그의 회고록 ‘사우스’에서 읽는다. 1914년 남극대륙 최초 횡단을 목표로 탐험길에 나섰지만 부빙(浮氷)에 배가 난파돼 탐험이 아니라 생존귀환이 목표가 됐던 셰클턴 탐험대. 사전은 탐험대가 침몰한 ‘인듀어런스’ 호에서 식량상자, 기름 등과 함께 건져낸 ‘생존 필수 품목’의 하나였다.

‘…저는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절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책들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몇 권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다. …백과사전이 불쏘시개로는 그만이라고 적극 추천하고자 한다.’

신년 벽두 영국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 경이 백과사전에 바친 예찬을 그의 회고록 ‘사우스’에서 읽는다. 1914년 남극대륙 최초 횡단을 목표로 탐험길에 나섰지만 부빙(浮氷)에 배가 난파돼 탐험이 아니라 생존귀환이 목표가 됐던 섀클턴 탐험대. 백과사전은 탐험대가 침몰한 ‘인듀어런스’호에서 식량상자, 기름 등과 함께 건져낸 ‘생존 필수 품목’의 하나였다.

‘…저는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살던 신영복 교수가 쓴 ‘아버님 전 상서’를 그의 편지들을 영인본으로 묶은 책 ‘엽서’에서 읽는다. 그는 봄 나비의 날갯짓을 보면 F 카프라의 현대물리학 책을 펴들고 여름에는 십팔사략(十八史略)으로 더위를 잊던 감옥의 다독가. 그러나 몸이 놓인 현실은 정신의 거처와는 달랐다.

세밑에 나온 두 책을 2003년이 가고 2004년이 오는 광화문에 앉아 읽기는 쉽지 않았다. 창밖에서 웅웅대는 확성기는 종일 “이라크 파병 반대”의 목청을 쏟아냈고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는 농민들은 도시의 찬 아스팔트 위에 드러누웠다. “우리 앞의 절벽을 내려가든지 아니면 먼 우회로를 통해야 목표점에 갈 수 있다”고 위기를 털어놓았던 섀클턴의 리더십이라면 현재의 상황을 달리 돌파할 수 있을까. 자신의 어린 자녀를 겨울 한강물에 밀어넣은 젊은 아버지를 보면서도 ‘진정한 기쁨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는 신영복 교수의 메시지에 여전히 기댈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어 무엇을 할 수 있나’를 묻게 되는 곳은 남극의 부빙 위나 감옥 안만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불편한 독서의 행간에 겹쳐진 것은 독일 작가 마르틴 발저의 단호한 한 문장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느낀다면 나는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섀클턴 탐험대에 백과사전은 불쏘시개만은 아니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그들이 환율 같은 ‘쓸모없는’ 문제를 토론하느라 백과사전을 뒤적였을 때, 책은 돌아가야 할 고향을 기억하는 끈이었다.

“독자는 모두 그 자신의 책을 읽는다”고 발저는 말했다. 책으로 묶여 시간의 풍상을 견뎌낸 신영복 교수의 감옥 편지들. 그 낡은 ‘엽서’에 여전히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그를 읽은 오늘의 독자들이 새롭게 쓴 것이다.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더라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해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큰 슬픔이 인내되고 극복되기 위해서 반드시 동일한 크기의 커다란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1968년 신영복 교수 메모 중)

정은령 문화부 차장 ryu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