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게이샤, A LIFE'…6세때 게이샤 입문 "예술 팔았죠"

  • 입력 2003년 11월 28일 17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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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샤로 활동하던 때의 이와사키 미네코. 일본 최고의 게이샤로 불렸던 그는 이 책에서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게이샤의 세계’를 풀어놓았다.사진제공 미다스북스
게이샤로 활동하던 때의 이와사키 미네코. 일본 최고의 게이샤로 불렸던 그는 이 책에서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게이샤의 세계’를 풀어놓았다.사진제공 미다스북스
◇게이샤, A LIFE/이와사키 미네코, 랜디 브라운 지음 윤철희 옮김/448쪽 1만5000원 미다스북스

제 이름은 이와사키 미네코입니다. 저는 ‘게이샤(藝者)’였습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저는 일본 최고의 게이샤로 불렸습니다.

외국인에게 게이샤는 일본 그 자체로 여겨지곤 합니다. 짙은 화장과 화려한 기모노는 일본을 표현하는 강렬한 상징입니다. 그러나 게이샤를 제대로 아는 외국인은 드뭅니다. 자칫 게이샤라고 하면 술손님들의 희롱 대상이거나 때로 몸을 파는 천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부당만부당한 오해입니다. 게이샤는 상류층 손님들의 연회를 주관하면서 예(藝)와 품위로 자리를 빛내는 자부심 강한 직업인입니다.

친부모님이 제게 남겨준 이름은 다나카 마사코입니다. 다섯 살 때 이와사키 가문의 오키야(置屋·게이샤들이 거주하면서 일하는 집)에 들어가면서 이름을 바꿨습니다. 오키야의 주인이었던 오이마 여사는 검은 머리, 작은 입술의 나를 처음 보자마자 가문의 후계자로 점찍었고 친부모를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게이샤가 되겠다고 결정한 것은 저 자신입니다. 다섯 살짜리가 인생의 행로를 정한 것입니다.

게이샤들은 스스로를 ‘게이코(藝子·예술을 하는 여자)’라고 부릅니다. 화려해 보이는 게이코의 삶에는 은밀한 고통이 함께 따릅니다. 제가 데뷔할 무렵의 몸무게는 36kg이었습니다. 그런데 머리장식을 갖춘 기모노 정장의 무게는 20kg쯤 나갑니다.

이런 육체적 고통은 사실 아주 작은 부분입니다. 게이코가 제몫을 해내려면 엄청난 공부가 필요합니다. 게이코는 ‘오자시키(お座敷)’라는 상류층 연회의 접대를 맡습니다. 게이코는 오자시키에 참석한 손님을 즐겁게 하기 위해 춤을 추고 얘기를 나눕니다. 연회에서는 전통예술과 다도, 시사문제와 현대문학, 꽃꽂이, 춤과 음악, 서예 등 높은 수준의 화제가 오갑니다.

저는 여섯 살부터 게이샤가 되는 수업을 받았습니다. 춤과 연주, 예의와 예술을 배우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게이샤의 세계를 ‘가류카이(花柳界)’라고 부릅니다. 저는 열다섯 살 때 가류카이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교양과 미모, 춤 솜씨를 갖춘 저는 데뷔 후 곧바로 최고가 됐습니다. 손님들은 늘 저를 원했고 스케줄은 빌 틈이 없었습니다.

게이코의 봉사료인 하나다이(花代)는 가류카이 전체에 공개됩니다. 저는 줄곧 교토 제일이었습니다. 한창 때의 제 수입은 일본 대기업 총수와 맞먹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 게이샤가 몸을 판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게이샤는 풍부한 고급 인맥을 가진 덕에 일본 상류층의 며느릿감으로 꼽힙니다. 정재계의 거물들이 저의 단골이었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비롯해 외국 국빈을 모시는 것도 저의 일이었습니다. 언론은 저를 최근 100년간 가장 성공한 게이샤로 보도했습니다.

제가 한창 때인 스물여덟살에 은퇴한 것은 가류카이 전체에 큰 타격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지쳐 있었습니다. 게다가 몇 백년을 이어온 낡은 방식을 고수하는 가류카이의 시스템은 시대를 좇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49년생. 만 54세가 된 저는 게이샤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게이샤가 자신의 이야기를 대중 앞에서 하지 않는 것은 암묵적인 금기와도 같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에 스스로 갇혀 있었던 셈입니다. 이제는 말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저의 개인사가 게이샤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을 밝히고 일본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다리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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