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롬멜'…롬멜, 영웅인가 히틀러의 충복인가

  • 입력 2003년 11월 28일 17시 30분


코멘트
2차 세계대전 당시 아프리카전선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둬 ‘사막의 여우’로 불린 롬멜이 전투지휘용 장갑차에 타고 있다. 롬멜은 뒷전에서 지도와 무전기만으로 전투를 치른 것이 아니라 직접 전선을 휘젓고 다닌 것으로 유명했다.사진제공 생각의나무
2차 세계대전 당시 아프리카전선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둬 ‘사막의 여우’로 불린 롬멜이 전투지휘용 장갑차에 타고 있다. 롬멜은 뒷전에서 지도와 무전기만으로 전투를 치른 것이 아니라 직접 전선을 휘젓고 다닌 것으로 유명했다.사진제공 생각의나무
◇롬멜/마우리체 필립 레미 지음 박원영 옮김/460쪽 2만5000원 생각의나무

에르빈 롬멜(1891∼1944). 이미 수십년 전부터 그의 이름은 ‘멀티 콘텐츠’로 가공돼 왔다. 플라스틱 모델 장난감으로, 할리우드제 전쟁영화로, 최근에는 컴퓨터게임으로, ‘사막의 여우’ 롬멜의 신화는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무엇이 그를 예외적인 존재로 만든 것일까. 악한으로 묘사되는 독일군 사이에서 그만이 유일한 영웅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아돌프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에 연루된 나머지 나치정권의 강요로 자살했다는 사실은 다소 낯설게 들릴지도 모른다.

롬멜을 다룬 다큐멘터리 필름의 감독이었던 저자는 ‘나치의 충실한 일원’, ‘히틀러에 저항한 영웅’ 등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롬멜을 제3의 눈으로 바라본다. 저자의 결론에 따르면 롬멜은 독일의 장래를 근심하며 나치의 비인도성에 대한 혐오로 방황을 거듭했지만 끝까지 히틀러에 대한 경외심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모순적 인물이었다.

나치 초기부터 롬멜과 히틀러는 상호의존적일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없었다면 롬멜은 눈에 띄지 않는 군인으로 평생을 보낼 운명이었다. 히틀러의 프라하 침공을 부추긴 이도, 독단으로 마지노선을 돌파해 서부전선의 승리를 열어젖힌 사람도, 동부전선 패배의 악몽 속에서 잇단 사막의 승전보를 전해 히틀러의 권위를 유지시켜준 이도 롬멜이었다.

나치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는 기자들과 영화 촬영기사를 아프리카에 보내 ‘민족영웅’ 이미지를 띄워 올렸다. 히틀러가 공식 석상에서 “롬멜 대장이…”라고 운을 띄우면 이미 장내는 환호로 가득 찼다. ‘적’도 그의 전설 만들기에 기여했다. 윈스턴 처칠은 의회 연설에서 “유감이지만 상대에게는 용감하고 유능한 장군이 있다”고 고백해야만 했다.

전설은 상당 부분 진실이었다. 저자는 분명 롬멜이 뛰어난 전략적 기술과 성취욕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전장에서 그를 목격한 사람들은 “그가 지휘차량에서 직접 총을 쏘며 전진했다. 성화(聖火)가 가슴에 불을 지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퇴각은 독일 정보전의 패배와 물자부족 때문이었다. 독일군의 암호는 예외 없이 영국 정보부에 의해 해독됐고 물자를 실은 선박들은 줄지어 침몰했다.

독일로 돌아온 롬멜은 분명 ‘충실한 나치’는 아니었다. 유대인 학살소식을 접한 그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고 그는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이며 학살행위는 크나큰 범죄”라고 심경을 토로했다. 전선에서도 롬멜의 군대는 제네바협정을 충실히 지키는 신사적인 군대였다.

히틀러 암살계획이 진행되던 중 영국 공군기의 공격을 받은 그는 병원에서 히틀러 암살 기도 실패 소식을 들었다. 계획이 성공하면 그를 원수로 추대하겠다는 귀띔을 들은 뒤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독자적인 계획을 갖고 있었다. 히틀러를 설득해 서부전선에서 영미군과 강화를 맺은 뒤 동부전선에서는 소련군에 저항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는 히틀러가 말을 듣지 않을 경우 혼자서라도 영미군과 교섭을 진행하려 했다. 끝내 실현되지 못한 그의 독자적 종전(終戰)계획은 오히려 돌발적인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양심과 상황에 따라 면밀히 검토해 결정한 그의 ‘최종계획’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책은 독일 ARD 방송 다큐멘터리 ‘롬멜신화’를 바탕으로 쓰인 것. 롬멜의 부관, 운전병, 가족 등과의 수많은 인터뷰가 박스기사 형태로 실려 사실성을 더해준다. 원제 ‘Mythos Rommel’(2002).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