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미석/왕들은 정말 행복했을까

  • 입력 2003년 11월 16일 1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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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TV드라마 ‘대장금’에서 주인공 못지않게 시청자를 사로잡는 것은 궁중음식이다. 곰발바닥에 닭과 인삼을 넣어 찜을 한 ‘계삼웅장’, 육포를 갈아 다식판에 찍어낸 ‘포다식’, 홍시로 단맛을 낸 ‘죽순채’ 등.

초호화판 음식을 매일 삼시 세끼 받아든 왕들은 정말 행복했을까. 나는 왠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무엇보다 왕들에겐 엄마 손맛에서 장터 국밥까지 다양한 수준의 다양한 맛을 고루 체험하고 비교할 수 있는 선택권이 원천 봉쇄돼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 소박한 밥상을 받아보지 못하고 산해진미로만 주입식 식사를 한 게 그리 행복하게 보이진 않는다. 다양성이 존재하고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그래서 즐겁고 소중한 일이다.

연일 화려한 밥상을 차리고 걷어내는 영화계를 바라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음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할리우드 흥행대작들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규모를 갖춘 몇 안 되는 한국 영화들이 국산품의 자존심을 걸고 맞대결을 펼친다. 관객들에겐 완전히 ‘대장금’식 밥상이다. 포만감도 잠시, 과연 작품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는가를 되묻는 관객들이 늘어가고 있다.

전국에 스크린은 1000개를 헤아리지만 ‘부자 영화’들 틈바구니에서 비할리우드권 영화나 적은 제작비로 공들여 만든 국내작품 등 ‘가난한 영화’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다. 364개 스크린에서 5일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매트릭스 3 레볼루션’은 국내 최다 스크린 석권 기록을 세웠다. 이란 영화 ‘내가 여자가 된 날’은 서울 시네큐브에서만 상영돼 지방 관객들은 만날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장기수의 삶을 그린 ‘선택’은 한국 영화만 배급하는 ‘청어람’사의 끈질긴 노력 끝에 20개 스크린을 확보했지만 지금은 2개관에서 겨우 맥을 잇고 있다.

영화 상영의 ‘부익부 빈익빈’현상은 1990년대 들어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의 출현과 함께 100∼200개 스크린에서 동시 개봉하는 ‘와이드 릴리스(Wide Release)’ 방식이 등장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이제 “첫주에 1등 못하면 망한다”며 엄청난 홍보비를 쏟아 부은 영화들, 그것도 스무살 전후 관객의 취향을 주로 염두에 둔 영화들이 극장을 메우고 있다. 매주 개봉되는 5∼10편 중 하루 만에 내리는 영화도 있다. 결국 상업성은 떨어지지만 영화적 미덕이 있는 작품의 제작이나 수입은 더욱 힘들어질 전망이다. 나름대로 영화를 골라보고 싶은 사람들은 이래저래 선택권이 줄어들고 있다.

극장이든 배급사든 자본의 논리를 따른다는 점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비자는 구미에 맞는 상품을 고를 권리가 있다. 고단하고 낙 없는 한국의 일상에서 영화는 대체 상품이 거의 없는, 물건을 깔면 팔릴 수밖에 없는 시장구조를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 멀티플렉스에서 전국의 몇 개 스크린 정도는 작품성 있는 영화, 30, 40대 이상도 좋아할 영화, 가족 영화 등을 안정적으로 상영하는 식의 ‘공익 마케팅’에 눈을 돌려봄 직하다. 기업은 공익 마케팅을 통해 브랜드 인지도 상승, 고객 충성도 증가, 판매 증진 등 여러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고 경영학자들은 조언하고 있다.

생물종 다양성이 지구 건강의 지표이듯이 문화의 다양성은 우리 사회의 기초체력을 재는 척도 아닌가. 정치의 독재만큼이나 무서운 것이 단세포 문화, 문화상품의 편식, 그리고 선택의 자유 부재다.

고미석 문화부 차장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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