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병주/포도 때문에

  • 입력 2003년 11월 16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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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재배는 메소포타미아 유역에서 비롯됐고, 술로 빚어지기는 기원전 6000년쯤부터라고 한다. 포도주 마시기가 이웃나라 이집트에 전파되자 상류층은 포도주를, 평민층은 맥주를 주로 마셨다고 하는데 특히 절대 통치자 파라오들은 죽은 뒤 저승여행의 고통을 덜려는 듯 무덤 속까지 포도주 항아리를 가져갔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지중해 연안 사람들이 야만상태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올리브와 포도를 재배할 줄 알고부터다”라고 기록한 것은 서양문명과 포도주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근대에 이르러 포도주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프랑스가 단연 선두에 나섰다. 19세기 초엽 유럽을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나폴레옹(1769∼1821)은 “승리하면 마땅히 샴페인을 마실 만하고, 패배하면 위로삼아 마셔야 한다”고 호언했다고 한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도 유명한 포도주 생산국이다. 유럽인이 정착한 남·북미 대륙(미국 칠레 등)과 호주도 근래에는 훌륭한 포도주 생산지가 되었다. 포도 재배는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 제국을 거쳐 중국으로 넘어왔다. 오늘날 중국 신장(新疆)성 타클라마칸 사막 언저리 둔황, 투르판 등지를 여행하면 포도를 말리는 움막집을 볼 수 있다.

▷포도주 마시기가 국내에 보급되기는 경제개발로 보릿고개를 잊을 만했을 때 ‘마주앙’이 나돌고부터였다. 근래에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사람들 사이에 ‘프랑스 역설’에 힘입었는지 적포도주 선풍이 불고 있다. ‘프랑스 역설’이란 미국인들이 자기네보다 육류 섭취가 많고 흡연이 심한 프랑스인들이 오히려 심장병 발생률이 낮다고 해서 붙인 말인데, 의료계에서는 그 비밀을 프랑스인들의 적포도주 사랑으로 풀이했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했던가. 세계에서 최고급 위스키시장을 싹쓸이하는 일본을 비롯한 동양의 졸부들이 포도주시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며칠 전 국내 두 항공사가 화물 전세기 11대를 투입해 프랑스산 보졸레누보 350만병을 한국과 일본으로 운송한 긴급공수작전 보도가 눈길을 끌었다. 항공사는 짭짤한 운송비 수입에 즐거워하지만 국민의 소비행태가 걱정이다. 좋게 말해서 신선한 와인, 솔직히 말해서 막걸리같이 텁텁한 보졸레누보를 좋아하는 층은 젊은 샐러리맨들이란다. 개중에는 카드빚을 연체한 신용불량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포도 때문에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이 꼬이고 있는 상황이다. 보졸레누보를 줄이고 칠레산 와인을 마시는 게 좋지 않을까.

김병주 객원 논설위원·서강대 교수 pjkim@ccs.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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