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오명철/기부자 괴롭히는 사회

  • 입력 2003년 11월 14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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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대선자금을 둘러싼 정치권의 더러운 싸움과 돈벼락 논란 속에서 우리가 그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던 것은 일평생 근검절약해서 모은 돈을 사회에 아낌없이 내어 놓은 어른들과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노인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고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자취를 감춘 30대 초반의 젊은이 덕분이었다. 그런 이웃들이 있어 우리는 이 혼탁한 시대에서도 ‘세상은 역시 살만한 곳’이라고 자위하며 묵묵히 일터로 향하곤 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역시 좋은 일에는 마가 끼는 모양이다.

▷대학발전기금과 문화재단 설립기금으로 1305억원을 쾌척한 부산의 송금조 ㈜태양 회장(79)이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카드빚을 갚아 달라”는 신용불량자에서부터 “후원회 회장이 돼 달라”는 정치지망생, “주식투자로 돈을 불려 반반씩 나누자”는 증권사 직원, 각종 자선·시민단체의 지원 요청이 잇따랐다는 것이다. 어제 송 회장에 대한 명예경영학박사학위 수여식장에서 부인은 “별 것 아니었다”고 했다지만 부산대와 취재기자에게는 이들 부부의 연락처를 묻는 전화가 쇄도했다고 한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 지경에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불가에서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강조한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나눔이 으뜸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과도 통한다. 참된 기부자는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기를 원치 않는다. 하지만 막대한 기부를 받는 쪽에서야 그들의 귀한 뜻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하는 법. 그 또한 탓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때로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니 문제다. 자수성가한 기업인이 수백억원의 부동산을 자선단체에 내놓았으나 언론보도 후 상속권자인 아들이 크게 반발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일도 있다.

▷오랜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부액수는 최근 몇 해 동안 150∼190%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연말연시에 모금액이 집중됐던 현상도 최근 들어 60%대로 완화됐다. 펜션 주인이 소년소녀가장을 위해 숙박권을 기부하고, 극장과 공연기획사들이 불우이웃에게 일정 비율의 공연관람석을 제공하는 등 기부품목과 방식 또한 다양해졌다. 하지만 부유층의 참여는 여전히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고, 단 한번도 기부를 하지 않은 한국인도 43%나 된다. 기부문화의 확산과 제도 정비 못지않게 기부자의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사회적 합의와 배려 또한 시급하다. 기부자를 괴롭히다니, 참으로 부끄러운 사회 아닌가.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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