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마르틴과 한나'…실존철학 거장과 여제자의 사랑

  • 입력 2003년 11월 14일 17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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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하이데거(왼쪽)와 한나 아렌트. 아렌트는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 신입생 시절 교수 하이데거와 처음 만났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곧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유대인이었던 아렌트는 훗날 나치와 협력했던 하이데거를 복권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마르틴 하이데거(왼쪽)와 한나 아렌트. 아렌트는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 신입생 시절 교수 하이데거와 처음 만났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곧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유대인이었던 아렌트는 훗날 나치와 협력했던 하이데거를 복권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마르틴과 한나/카트린 클레망 지음 정혜용 옮김/415쪽 9500원 문학동네

“인간의 실존에는 두 가지가 있다.”

20세기 독일 철학계의 거봉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는 눈앞의 사물에만 마음을 빼앗기는 일상적 인간의 비본래(非本來)적 실존, 또 하나는 과거로부터 자신을 되찾아 장래를 향해 결의하며 살아가는 ‘본래적’ 실존.

무엇을 택할 것인가. 답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만약’ 이라며 이 책의 작가는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그의 ‘실존’의 정의가, 은밀한 사랑 속에서 성립된 것이라면? 그가 가족과의 일상을 ‘비본래적’ 실존으로 여기고 연인과의 일탈 속에서 ‘자신을 되찾는’ 본래적 실존을 발견했다면?

분명한 것은 ‘그녀’가 없었다면 자신의 사상을 집약한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1927)’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하이데거가 직접 고백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바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전체주의에 대한 심원한 통찰을 펼쳐낸 철학사상가 한나 아렌트(1906∼1975).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지적(知的) 만남 중 하나로 꼽히는 두 사람의 관계를 다룸으로써, 작가는 진부해보일 수 있는 3각관계의 이야기 구조 속에 지적이고 호기심 많은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가 1970년대 늙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마르틴의 집을 찾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짧은 만남을 예정했던 한나는 비를 동반한 돌풍 때문에 발이 묶인다. 한나와 마르틴의 아내 엘프리데, 두 여인은 모처럼 오랜 대화를 나눈다. 상대방의 약점을 교묘히 건드리는 두 여인의 신경전 속에, 먼 과거의 일이 회상으로 재현된다.

35세의 대학교수였던 마르틴. 지적 호기심 넘치는 대학 신입생 한나에게서 ‘잃어버린 동방, 그리스의 정신’을 발견한다. 아버지 없이 자란 한나는 마르틴에 자신의 이상적 남성상을 투영한다. 짧은 격정 끝에 한나와 결별한 마르틴은 ‘존재와 시간’ 집필에 몰두한다는 구실로 가족과 떨어져 외딴 농가에 틀어박히지만, 그것은 ‘연인을 떠나보낸 자의 고독’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2차대전 직후 찾아온 한나는 엘프리데의 눈에는 평온한 가정을 위협하는 ‘침입자’일 뿐. 그럼에도 한나는 당당하다. 무엇 때문일까. 마르틴은 30년대에 엘프리데의 뜻을 좇아 나치 추종자로서 프라이부르크대 총장에 취임한다. 유대인이었던 한나는 망명의 길을 택한다. 나치 부역자로 박해 받던 마르틴 하이데거의 구명운동에 앞장선 사람은 전체주의의 정체를 드러내는 데 가장 탁월했던 ‘나치 피해자’, 한나 아렌트였다.

회상에서 돌아온 한나는 마르틴의 집을 나서기 전 마음속으로 외친다. 4개월 뒤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날 것도 모른 채.

“신의 뜻대로, 죽고 난 후에 당신을 더욱 더 사랑할 거예요.”

작가는 철학소설 ‘테오의 여행’으로 명성 높은 철학자 겸 저널리스트. 그가 그려낸 세 주인공의 내면풍경은 종종 모순되고 모호하며 특히 하이데거의 시선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아 아쉬움을 준다. 그러나 약속장소에 도착한 한나가 “반갑구나 욕망아, 네가 먼저 왔구나, 조금만 있으면 마르틴이 올 거야”라며 방망이질치는 가슴을 달래는 등의 몇몇 장면은 기대 밖으로 ‘관념’이 때로는 얼마나 달콤할 수 있는지를 경험케 해준다.

원제 ‘Martin et Hannah’(1999).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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