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백선기/'저주' 담론의 유행

  • 입력 2003년 10월 19일 18시 05분


코멘트
‘가을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미국 야구의 월드시리즈 팀들이 결정됐다. 리그 챔피언 전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와 시카고 컵스가 우승 문턱에서 또 한번 좌절하게 되었다. 두 팀 모두 7차전에서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다가 어이없이 역전패한 것이다. 이를 두고 미국에서 ‘저주’의 담론이 확산되고 있다. 보스턴의 경우는 전설적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를 헐값에 트레이드 한 이후 85년간 ‘밤비노(루스의 애칭)의 저주’가 내려졌다고 하고, 시카고의 경우는 애완염소와 같이 온 관중이 경기장에 입장하지 못하자 퍼부은 ‘염소의 저주’가 작용한 것이라고 한다.

▷저주란 특정 대상자에 대한 원망이나 증오로 인해 상대가 잘되지 못하도록 비는 마음이나 기원을 의미한다. 이러한 심리적 기원 상태가 특정현상과 연계돼 그럴싸한 ‘연계관계’로 포장되어 사회로 확산되면,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는 ‘신화적 관계’로 진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적 연계는 주로 부정적인 현상과 결부되어 있다. ‘밤비노의 저주’나 ‘염소의 저주’라는 비과학적(심지어 주술적)인 연계적 설명이 자명한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져, 이번 월드시리즈의 결과도 이 같은 저주로 인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 이후 우리 사회는 일종의 공황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당사자의 의중이나 진심과는 별개로 재신임 선언은 여러 갈래의 담론으로 연계되어 전개되고 있다. 정당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노 대통령 또는 상대 정당을 비난하고 힐난하며 나아가 원망하기까지 한다. 처음에는 국민투표를 통해 재신임을 묻는 것으로 조율되는 것 같더니 갑자기 정당들 사이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을 바꿈으로써 정국 자체를 혼미의 상태로 빠뜨리고 있다. 이들의 바뀐 입장과 상대방을 원망하는 ‘저주의 담론’들만이 어지러이 정치권을 휘돌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 재직 때에도 재신임을 묻는 중간평가라는 것이 있었다. 당시의 중간평가는 공약사항이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들 사이의 이해관계에 의해 담론만 무성한 채 실현되지 못했다. 이번의 경우는 공약사항도 아니고, 측근의 비리에 직면한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제기한 것이기에 더욱 그 추이가 궁금해진다. 서로를 불신하며 상대방의 저의를 제 입맛대로 해석해 힐난해 온 것이 우리 정치권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야기된 ‘저주의 담론’이 우리 정치권에도 만연한 것 같아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백선기 객원논설위원·성균관대 언론학교수 baek99@chollian.net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