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로베르 인명사전'…운명은 주어진걸까

  • 입력 2003년 10월 10일 18시 07분


코멘트
◇로베르 인명사전/아멜리 노통 지음 김남주 옮김/ 175쪽 7000원 문학세계사

프랑스 작가 아멜리 노통이 지난해 발표한 소설로 ‘나를 죽인 자의 일생에 관한 책’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아 놓았다. 유년과 살인, 에로티시즘이 노통 특유의 치밀한 플롯, 냉소적 재치, 간결하고 경쾌한 필치로 그려졌다. 특히 발레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눈길을 끈다.

열아홉 살에 결혼해 아이를 갖게 된 뤼세트. 결혼 전에는 매혹적인 왕자였던 남편 파비앙이 더 이상 대단한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뤼세트는 임신 9개월째 되던 어느 날, 실업자 파비앙, 생활비, 암담한 미래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그날 밤 뱃속의 아기는 딸꾹질을 하고 뤼세트는 남편을 권총으로 살해한다. 남편이 아기에게 아무 의미 없는 이름을 지어 주려 했기 때문.

“아이에게 탕기나 조엘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그 애에게 진부한 세상, 이미 닫혀 있는 시야를 주는 것과 다름없어. 하지만 난 내 아기가 힘껏 무한을 품었으면 좋겠어. 내 아기가 그 어떤 제약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아이에게 특별한 운명을 약속하는 이름을 주고 싶어.”

뤼세트는 딸아이에게 ‘플렉트뤼드’라는 이름을 지어준 뒤 감방에서 목을 매 자살한다. 이모의 집에서 자라난 플렉트뤼드는 네 번째 생일선물로 발레 슈즈를 원한다. 아이에게 학교는 줄곧 지옥과 같았지만 발레시간이 있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거식증을 앓고 있었던 플렉트뤼드는 영양 결핍으로 남모르는 고통을 받는다. 결국 다리뼈가 부러져 춤을 포기하고 만다. 아이는 엄마로만 알고 있던 이모에게 출생의 비밀을 듣는다.

플렉트뤼드는 자신의 생모처럼 열아홉 살에 아이를 낳고 퐁뇌프 다리에서 허공에 몸을 던지려다 학창시절 사랑했던 남자를 다시 만난다. 몇 년이 흐른 뒤 플렉트뤼드는 용기를 내 성악가가 되고 ‘로베르’라는 예명을 쓴다.

이야기의 끝부분, 작가인 아멜리 노통은 ‘벨기에의 재앙’이란 이름으로 등장해 플렉트뤼드와 만난다. 친모가 친부를 살해하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플렉트뤼드는 살의를 억누르지 못하고 아멜리를 권총으로 쏴 죽인다.

“아멜리가 신통찮은 작품을 쓰는 걸 막을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었어.” 플렉트뤼드와 남편이 눈물어린 눈으로 시체를 보는 장면으로 소설이 끝난다. 노통은 “작가에게 있어서 자신을 살해한 자의 전기를 쓰는 것만큼 유혹적인 일도 없다”고 말한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