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연인아 연인아'…이데올로기에 막힌 비극적 사랑

  • 입력 2003년 9월 26일 17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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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아 연인아/다이허우잉 지음 김택규 옮김/236쪽 8000원 휴머니스트

“7년하고도 3개월, 짧지 않은 시간이었어. 그러나 내 마음 속에서 핏자국의 색깔은 갈수록 짙어졌고 슬픔의 맛도 갈수록 강렬해지기만 했어… 마음 속 깊이 숨겨둔 사랑과 그리움을 색깔도 냄새도 없는 죽은 꽃으로 만들어 그에게 바칠 수 있을 뿐….”

1978년 4월, 작가 다이허우잉(戴厚英)은 네 권의 연습장에 빽빽이 적은 장문의 편지를 친구 가오윈에게 부친다. 편지에 담긴 내용은 7년 전 비극으로 끝난 자신의 불같은 사랑.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극좌파인 조반파(造反派)에 속해 있던 다이허우잉은 자신보다 열다섯 살 많은 작가 원제(聞捷)의 조사를 맡는다. 남편의 노동교양소 격리수용으로 충격을 받은 시인의 부인은 자살했고, 다이허우잉은 작가에게 그 일을 알리는 일을 맡는다. 얼마 뒤 남편에게 충격적인 이혼 통보를 받은 작가는 풀려난 작가와 함께 일하게 된다. 그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온 시인. 어느 날 그가 건네준 시 전체를 읽은 뒤, 작가는 행복감에 취한다.

“결정했소?” “결정했어요.”

“마음 변하면 안 돼요.”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일찍부터 문혁의 비판대상이었던 시인과 문혁의 중심세력이었던 작가의 결합이 ‘상부’에 곱게 비칠 리 없었다. “동무는 연애라는 명목으로 조반파를 타락시키고, 아울러 혁명투쟁을 타락시켰소.”

이 고백체의 편지는 그대로 다이허우잉의 소설 ‘시인의 죽음’에 확대된 형태로 옮겨졌으며, 나아가 한국에서도 스테디셀러인 ‘사람아 아, 사람아’의 짙은 휴머니즘적 울림으로 형상화됐다. 그러나 작가 자신의 경험이 첨삭 없는 고백 그대로 담긴 것은 개인 서신인 이 책이 유일하다.

작가정신에 투철했던 다이허우잉은 개인적인 편지인 이 글에서도 사건과 배경을 정돈된 상태로 배치해 잘 짜인 서간체 소설을 읽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작가의 갑작스럽고도 불행한 죽음이 없었다면 이 텍스트는 공개되지 못했을 것이다. 편지를 받은 벗 가오윈은 1996년 다이허우잉이 괴한의 습격으로 죽자 18년 동안이나 묻어두었던 이 편지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사람아 아, 사람아’에서 작가가 강조하는 인간주의의 호소에 앞서, 벗에게의 고백인 이 책에서는 개인적인 아픔의 울림이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원제와의 사랑을 다짐하던 시기 둘이 함께 읊은 소동파의 시 ‘다만 오래오래 살아, 천 리에 고운 달을 함께 봤으면’이라는 구절은 결국 이룰 수 없는 소망에의 탄식으로 변해 짙은 아픔으로 남는다.

결혼에 이어 다이허우잉과의 만남마저 비판받자 원제는 의논 없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스산한 시절을 몇 차례 겪었던가/ 하늘과 인간 세상 모두 다 아득하네…’라는 칠언절구로 작가는 가슴 시린 고백을 끝맺는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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