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진주귀고리 소녀'…'북구 모나리자' 매혹의 비밀

  • 입력 2003년 8월 29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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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귀고리 소녀'(1665~1666년경. 캔버스에 유채,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소장). 북구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소녀의 아름다움은 진주의 빛을 통해 정점에 이른다. -사진제공 강
'진주귀고리 소녀'(1665~1666년경. 캔버스에 유채,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소장). 북구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소녀의 아름다움은 진주의 빛을 통해 정점에 이른다. -사진제공 강
◇진주귀고리 소녀/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303쪽 9500원 강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듯 화들짝 하며 왼쪽 어깨를 틀어 돌아보는 소녀.

커다란 두 눈은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방심한 듯 보여 유혹적이기도 하다. 소녀의 시선에 담긴 것은 두려움일까, 아니면 갈망일까. 그리고 그림 속에 한줄기 빛처럼 자리매김한 진주귀고리의 의미는?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거장 얀 베르메르의 대표작 ‘진주귀고리 소녀’, 일명 ‘북구의 모나리자’.

그림이 그려진 지 300년도 더 지난 1998년 2월의 어느 날 아침. 잠에서 막 깨어난 젊은 여성소설가 트레이시는 침실 벽에 10년 넘게 붙여둔 이 그림의 복사본을 처음인 듯 응시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조금 입을 벌린 소녀를 바라보던 소설가는 한순간 그녀를 대신해 이야기를 복원할 것을 결심한다. 어떤 힘이 이 고혹적인 소녀를 그려낸 것일까. 엄정한 사실(史實)과 종횡무진의 상상력을 교직해야 했다. 먼저 작가는 소녀의 이름을 ‘그리트’로 정했다.

●하녀와 주인

1664년 네덜란드의 델프트. 사고로 눈이 먼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게 된 열여섯 살의 그리트는 델프트 화가 길드의 거물인 베르메르의 집 하녀로 고용된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붓 한 자루 움직인 흔적 없이 베르메르의 화실을 청소하는 것.

검소한 신교도인 그리트에게 부유한 가톨릭 부르주아인 베르메르의 집은 낯선 영토다. 손 마를 새 없이 밀려드는 빨래거리와 집안일들, ‘이방인’으로서 고독에 시달리는 그리트가 유일하게 안식을 느끼는 공간은 화실. 그리트는 베르메르와 침묵 속에 교감하며 점점 ‘그는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본다’는 것을 이해해 간다.

“저 구름들이 무슨 색이지?”

“하얀색이지요, 주인님.”

“그리트, 넌 더 잘 할 수 있어.”

“…푸른색도 약간 있고요, 음 노란색도, 그리고 약간의 초록색도 있네요!”

“그래, 그리트. 사람들은 구름이 하얗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구름 속에서 순전한 흰색을 찾기란 힘들지.”

베르메르의 눈은 그리트 안에 잠재해 있던 예술가로서의 눈을 일깨운다. 빛을 받은 흰 벽은 결코 흰색만이 아니었다. 그리트는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게 됐다.

●진주귀고리

베르메르는 그리트에게 그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았던 물감 만드는 일을 청한다.

‘나는 점점 그와 함께 있는 것에 익숙해졌다.…창으로 쏟아지는 빛 속에서 흐르던 그 시간들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이는 두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비밀. 베르메르에게는 아내와 여섯 아이가 있었다.

불안한 관계의 파국은 엉뚱한 방식으로 다가온다. 베르메르의 재정적 후원자인 탐욕스러운 세력가 반 라위번이 아름다운 그리트를 그려달라고 요구한 것. 탐욕스러운 반 라위번은 “그림이 완성되는 날, 그리트마저 갖겠다”고 추근댄다.

“탁자나 의자, 그릇이나 주전자, 병사와 하녀,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의 모든 것들을 그리는 것 또한 하느님의 창조를 찬양하는 것”이라던 성실한 화가 베르메르에게 ‘가장 그리고 싶은 피조물’인 그리트를 그리는 일은 이제 최상의 기쁨이자 거부하고 싶은 고통이 된다.

그림의 완성을 앞두고 머뭇거리는 베르메르. 그리트는 그 이유를 안다. 그리고 생각했다.

‘필요한 것이 있다. 다른 그림들을 그릴 때 그림 속으로 눈길을 잡아끌기 위해 그가 사용하던 번쩍이는 한 지점이었다. 몸이 떨렸다.’

베르메르는 아내의 진주귀고리를 빼내 그리트에게 건넨다. 아직 여린 귓불에 피를 흘리며 구멍을 뚫는 그리트. ‘나는 알았다.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선택임을….’

●사실 혹은 허구

베르메르의 뮤즈가 되는 작중인물 그리트를 제외하고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실존인물이다. 화가들의 후원자였던 반 라위번, 베르메르의 유언장 집행자이자 그에게 원시적 형태의 카메라인 ‘카메라 옵스큐라’(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라는 뜻)를 빌려주어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준 반 레벤후크, 부유한 가톨릭 미망인인 장모와 그 아내…. 베르메르가 처가살이를 하던 집은 사라졌지만 신·구교가 구역별로 나뉘어 서로 섞이지 않은 채 동거하던 시가지의 모습은 오늘날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빛나는 회화들을 낳았던 17세기 네덜란드의 사회적 풍경을 가늠케 하는 역사소설이다.

미국 태생으로 올해 41세인 작가는 16세기 프랑스 종교개혁을 다룬 첫 작품 ‘버진 블루’에 이어 99년 두 번째로 이 작품을 탈고해 평단과 출판계에서 두루 주목받았다.

작가는 같은 작품을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린 베르메르의 붓질처럼 정교한 배치로 얼핏 연애소설처럼 보이는 이 예술가소설의 정점을 향해 나아간다. 자신이 만든 조각을 사랑한 그리스신화의 피그말리온처럼 베르메르는 그림 속의 소녀를 더 사랑했던 것일까.

소설 속에서 그리트는 베르메르가 죽고 난 후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다. 베르메르가 임종시 침상 옆에 ‘진주귀고리 소녀’ 그림을 갖다놓았다고….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화가의 아틀리에’(1662∼1665년 경. 빈 예술사박물관 소장). 등을 보인 화가가 베르메르로 추정된다(부분).

▼베르메르는 누구? ▼

▽베르메르(Jan Vermeer·1632∼1675)는 누구?= ‘진주귀고리 소녀’ ‘델프트 풍경’ 등을 남긴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19세기초에 재발견됐고 현존 작품은 35점에 불과하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그의 ‘델프트 풍경’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극찬했다.

신교가 주류이던 당시 네덜란드 사회에서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한 이례적 인물. 한때 델프트 화가 길드의 대표를 맡았고 부유했지만 네덜란드가 영국의 항해조례 때문에 교역로를 봉쇄당하고 프랑스와의 전쟁(1667∼1678)에서마저 패하자 베르메르도 몰락했다.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11명의 아이와 빚더미.생전에 부유한 처가 덕을 보았던 베르메르는 그림을 팔아 생계를 잇지 않아도 돼 2, 3년에 한 점 정도의 그림을 그렸다. 특이한 점은 현존 작품 대부분이 창이 세 개인 그의 스튜디오에서 그려졌다는 점. 그는 특히 북서향 쪽에 모델을 세우길 좋아했는데 이 위치에서는 빛이 분산돼 고르게 흩어졌기 때문이란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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