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정연욱/'변화' 못읽는 한나라당

  • 입력 2003년 6월 11일 18시 20분


코멘트
당 대표 경선 후보등록일인 11일 소집된 한나라당 최고위원회는 선거관리를 맡고 있는 당 선관위의 선거인단 선정 작업을 ‘엄청난 자해행위’로 규정했다. 선거인단 선정 실무 작업을 주도한 김광원(金光元) 의원은 이날 선거인단 소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당 선관위가 이틀 전인 9일 발표한 선거인단 22만7000여명(전체당원의 0.6%)의 연령별 분포도가 ‘엉터리’로 밝혀진 데 대한 자책(自責)이었다. ‘50대 이상 77%, 20대가 0.05%’란 수치가 공개되면서 ‘한나라당=경로당(黨)’이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들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김수한(金守漢) 당 선관위원장은 10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컴퓨터에 연령별 기준연도를 잘못 입력했다”고 정정했고, 20, 30대가 22.8%, 50대 이상은 43.9%로 수정 발표했다. 하지만 워낙 상식 밖의 정정 소동 때문이었는지 수정발표 내용에 대해서도 “한나라당이 경로당의 이미지를 피하기 위해 수치를 조작한 것 아니냐. 처음 발표가 맞는 것 아니냐”라는 냉소적 반응도 없지 않았다.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최고위원회가 다른 날도 아닌 후보등록일에 ‘자해’ 운운하며 스스로의 한심함을 자탄했지만 당 지도부가 정말로 ‘한나라당의 현주소’에 대해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 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박희태(朴熺太) 대표조차 “이번 손상을 무엇으로 만회할지 참으로 캄캄하다”면서도 컴퓨터에 책임을 돌리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는 “우린 컴퓨터를 맹신하는 경향이 있는데 컴퓨터는 인간이 조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선거인단 선정의 기초 작업부터가 부실했다는 징후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당 선관위는 ‘젊은층’의 표심(票心)을 반영한다는 취지를 살려 도시의 경우에는 만 45세 미만의 선거인단 비율을 50%가 넘도록 한다는 것을 명문화했다. ‘젊은층의 코드’를 읽지 못해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나름대로의 반성이 담겨 있는 규정이었다.

그러나 이 규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처음부터 대외용인 규정이었던 셈이다.

대표경선 후보인 김형오(金炯旿)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당 선관위는 지구당별 연령비에 대한 세부 자료 공개를 거부했다”며 “누가 대표가 되느냐를 떠나 이런 식의 선거라면 한나라당은 ‘노인당’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다”고 비판했다.

한나라당은 ‘공룡급 선거인단’을 만드는 데 열중한 나머지 정작 고려해야 할 시대변화의 코드는 읽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정연욱 정치부기자 jyw11@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