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매혹의 질주…'‘조선의 애환’ 안고달린 일제철도

  • 입력 2003년 5월 30일 17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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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는 시공간에 대한 의식과 풍속의 변화를 불러 온 근대화의 촉매였다. 철로 위에서 일상이 달리게 된 것이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철도는 시공간에 대한 의식과 풍속의 변화를 불러 온 근대화의 촉매였다. 철로 위에서 일상이 달리게 된 것이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박천홍 지음/447쪽 1만5000원 산처럼

철도와 그 위를 달리는 기차는 ‘진보의 세기’가 낳은 근대문명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도시와 도시, 도시와 광산을 연결하는 철도는 산업혁명을 이끈 핵심적인 힘이었으며 자연을 절단하고 해체하여 인간의 지배 하에 두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근대의 총아이기도 했다. 동시에 과학과 이성, 합리성을 배후에 거느린 기차는 햇빛을 받아 빛나는 강철만큼이나 예리한 ‘문명’이라는 이름의 시선으로 ‘야만’을 감시하고 길들이는 제국의 ‘칼날’이었다.

일본 근대가 낳은 대표적인 작가 나쓰메 소세키가 말했듯, 기차에 실리는 순간 우리는 이미 주어진 길을 달릴 수밖에 없는 하물(荷物)이 된다. 샛길이라곤 없다. 다양성의 시공간을 살해하고 탄생한 ‘동시성의 네트워크’ 안에서 인간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짐짝이 됨으로써 기꺼이 근대인이자 문명인임을 확인하곤 했다. 경이와 전율, 그리고 불안이 뒤섞인 눈길로.

철도는 시공간의 배치를 근대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근대인의 신체와 의식, 그리고 욕망을 뒤바꿔 버린다. 그런 까닭에 한국의 근대 역시 철도의 역사를 빼놓을 경우 많은 것을 놓치기 쉽다. 철도는 근대 한국인에게 문명을 가르치는 학교이자 극장이었으며 유행과 욕망을 전파하는 강력한 미디어였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의 이념과 전쟁을 실어 나르는 통로이면서 일제가 한국을 감시하는 촘촘한 그물망이기도 했다. 근대가 일상적 착취와 수탈, 감시를 특징으로 한다면 근대의 대표적 상징인 철도 역시 예외일 수 없을 터이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의 한국에서 기차라는 문명의 기호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탐색한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철도가 삶의 역동성을 약속하는 문명의 축복이기엔 현실이 너무 버거웠다. 축복의 기억보다는 애환과 비애의 기억을, 오욕과 수치의 기억을 상처처럼 간직하고 있다. 철도는 근대성과 식민성이 엇갈리고 겹치는 횡단선이며, 이 슬픈, 또는 아픈 횡단선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국 근대가 안고 있는 환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이런 한국 근대가 안고 있는 기억 때문이다.

철도와 근대성의 관련 양상에 대한 연구는 몇몇 전문 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진행돼 왔다. 하지만 ‘무거워서’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에 비해 다양한 철도 관련 자료와 문학 텍스트들을 동원해 한국 철도의 궤적을 되돌아보고 있는 이 책은 매력적인 문체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철로와 기차, 역을 배경으로 경성역과 박람회장, 기차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한국의 풍경과 철도 자살 장면 등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도 순전히 글을 엮어내는, 무거운 주제들을 ‘가볍게’ 그려내는 문체의 유연성 덕분이다.

전통적인 시간과 공간을 살해하고 등장한 게 철도라고 했거니와 이 책을 덮고 난 다음에 찾아올 질문, 즉 그 살해의 대가가 무엇이었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앞당겨 얘기하자면, 한국 근대의 시공간을 가로질러 달려온 기차는, 아니 문명은 그 자체가 죽음을 향한 ‘매혹적인 질주’였는지도 모른다.

정선태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연구원 st82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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