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다른 세상에서'…페미니즘, 백인여성의 전유물?

  • 입력 2003년 5월 30일 17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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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여인들. 저자인 스피박은 여성들 사이의 인종과 계급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기존의 페미니즘을 새로운 문화적 제국주의의 한 형태라고 비판한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여인들. 저자인 스피박은 여성들 사이의 인종과 계급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기존의 페미니즘을 새로운 문화적 제국주의의 한 형태라고 비판한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다른 세상에서/가야트리 스피박 지음 태혜숙 옮김/552쪽 2만8000원 여이연

인도 출신의 영문학자인 가야트리 스피박은 1976년 난해한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영역하면서 미국 지성계에 화려하게 신고했다. 폴 드 만의 영향을 받은 그녀의 해체적 글쓰기는 영문학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인문학의 거장들을 치열하게 검토해간다. 우선 단테로부터 영감을 받은 예이츠, 콜리지, 워즈워스,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이 ‘해체’의 대상이고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크리스테바, 식수, 이리가라이 등 프랑스 페미니즘이 다분히 탈식민적이고 유물론적인 그의 사유의 그물망을 힘들게 통과해 나간다.

텍스트의 ‘안과 밖’을 모두 텍스트로 삼는 스피박의 글쓰기는 데리다 식의 해체적 비평관에 기초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와 딜레마도 함께 의식하고 있다. 가령 “해체의 기획은 반드시 내부로부터 작동하며 전복의 전략적 경제적 자원들을 따로 떼어내지 않고 구조적으로 빌려오므로 자승자박의 측면이 있다”는 데리다의 언명이 자주 인용된다.

역자가 다른 연구에서 잘 설명한 대로, 페미니즘 논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스피박의 해체적 글쓰기의 큰 특징은 자본주의 체제와 결합된 ‘자궁중심사회’를 비판하고 그것을 ‘음핵중심’ 담론으로 재구성한다는 점일 것이다. 음핵중심의 사회조직을 배제한 자궁중심사회는 여성의 욕망을 자본주의 경제질서 속에 편입시키고 그것을 착취하는 사회이다. 때문에 여성 욕망의 복원은 단순한 생리학적 섹슈얼리티(sexuality)의 차원을 벗어나 새로운 사회의 구성에 필수적이 된다.

섹슈얼리티가 우선적으로 해체적 대상이 되는 까닭은 그것이 더 이상 사적 영역에 머물지 않고, ‘개인적인 것이 철저히 정치적인 것’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섹슈얼리티는 노동과 인종, 계급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가령 남성중심적인 임금노동과 생산이론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여성의 노동, 즉 ‘감성노동’의 문제는 ‘탄생-성장-가족생활 재생산의 역학’을 포함시켜야만 제대로 문제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3세계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스피박은 인종의 범주를 여성 문제 연구에 중요한 요소로 삼는다. 여성들 사이의 인종과 계급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기존의 페미니즘은 새로운 문화적 제국주의의 한 형태이므로, 페미니즘은 인간 주체를 성, 젠더, 인종, 계급의 관점에서 중층적으로 파악하는 탈식민주의를 마땅히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3세계의 여성이 중심에 진입하여 중심을 주변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은 백인중심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경향과도 뚜렷이 구별된다.

‘배움에서 벗어나기(unlearning)’로 특징지어지는 스피박의 사유는 자연스럽게 서구 인문주의 전통을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본질주의 및 ‘보편적 인간(성, 인종, 계급을 초월한 백인중심적 인간)’에 대한 부정, 그리고 주변부를 배제하려는 서구학계(미국)의 편향된 정치성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하위주체(the subaltern)연구는 단연 흥미를 끄는 부분이다. 그는 하위주체가 절대적인 타자, 순수한 외재성으로서 지배담론 밖에 머무는 것을 경계하고 오히려 안에서 균열을 도모함으로써 지배담론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각고의 흔적이 보이는 이 책은 스피박 연구의 거의 모든 의제들을 망라하고 있다. 비동시적인 것들, 즉 전근대 근대 탈근대가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여성 하위주체들이 여전히 여러 겹으로 타자화된 우리 현실에 비춰 볼 때 스피박의 이 ‘문화정치학 에세이’는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문화론 논의를 한국적으로 재맥락화하고 논의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김동윤 건국대 교수·불문학 aixprce@kkucc.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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