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오만과 편견'…제국-민족주의는 적대적 공존관계

  • 입력 2003년 5월 16일 17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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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 나오키 교수(왼쪽)와 임지현 교수는 일본인의 ‘유죄 의식’과 한국인의 ‘희생자 의식’이 서로 적대적 공존관계에 있다는 데 대해 공감했다.사진제공 휴머니스트
사카이 나오키 교수(왼쪽)와 임지현 교수는 일본인의 ‘유죄 의식’과 한국인의 ‘희생자 의식’이 서로 적대적 공존관계에 있다는 데 대해 공감했다.사진제공 휴머니스트
◇오만과 편견/임지현·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 대담/481쪽 1만8000원 휴머니스트

미국에서 일본 현대사상을 연구하는 사카이 나오키 교수(코넬대 아시아연구과)와 한국에서 동유럽사를 연구하는 임지현 교수(한양대 사학과). 두 사람은 각각 일본인과 한국인이면서도 일본과 한국을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기 좋은 자리에 있다. 이들은 이런 강점을 이용해서 제국의 과거를 가진 일본인과 식민지의 경험을 가진 한국인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을 촉구하는 질문을 던져 왔다.

2001년 서양철학자 김용석(전 이탈리아 그레고리안대 교수)과 동양철학자 이승환(고려대 교수)의 대담집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메일을 주고받다’를 기획 출간했던 ‘휴머니스트’가 다시 이 두 학자의 대담집을 기획했다. 두 사람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약 27개월간 ‘경계짓기로서의 근대를 넘어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서울 도쿄 뉴욕 등을 넘나들며 10여 차례의 대담을 가졌고 이 책은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들은 서구에서 비롯돼 현재 일본과 한국을 규정지으며 ‘오만과 편견’을 유발하는 근대의 주제들을 화두로 잡았다. 제국과 식민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국가주의), 동양과 서양, 남성과 여성, 백인과 유색인. 두 사람에 따르면 이 ‘경계짓기’의 개념쌍들은 서로 맞서면서 서로를 정당화한다.

제국주의의 과거 청산에 대한 일본의 실패는 다시 한반도의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과거에 대한 ‘유죄 의식’을 가진 일본인들은 식민지의 ‘희생자 의식’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한반도의 저항적 민족주의에 내재된 억압과 차별과 배제의 논리에 대해 눈감아버린다. 이렇게 해서 강화된 한반도의 식민지적 ‘희생자 의식’은 배타적 민족주의를 정당화하고 자신들이 잠재적 제국주의로 나갈 위험성이 있다는 데 대한 자기 성찰을 근원적으로 가로막는다. 이런 민족주의는 현재 세계사적 구도 속에서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한 반발로 인해 더욱 강화되고 이렇게 강화된 주변부의 민족주의는 다시 미국이라는 중심부의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강화한다. 마찬가지로 동양과 서양, 남성과 여성, 백인과 유색인 등의 근대적 개념쌍들은 자기의 존재조건으로 서로를 필요로 한다.

두 사람은 이렇게 배타적인 자기 정체성 확립 과정에서 만들어진 “민족 또는 국가 의식의 형성은 겨우 200년이라는 역사밖에 가지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중심부 제국주의와 주변부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존 관계가 형성돼 온 과정에 대한 세계사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의 근대가 어떻게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며 형성돼 왔는지 한꺼풀 한꺼풀 벗겨 나간다.

무거운 주제지만 이성과 감성을 뒤섞어 풀어내는 ‘대담’의 형식은 이 문제들이 우리 모두의 현실임을 절감하게 한다. 사상사 연구자인 사카이 교수는 두 나라 국민의 의식에 대해 날카로운 성찰의 메시지를 던지고 역사학 연구자인 임 교수는 세계사의 맥락에서 폭넓은 사실적 예증을 제시한다. ‘오만과 편견’을 유발하는 공동의 적을 향한 두 사람의 언어는 서로 다른 색깔로 어울리며 양국의 독자에게 반성적 성찰을 호소한다.

두 사람의 대담은 한글로 기록되는 동시에 일본 이와나미(岩波)출판사에 의해 일본어로 기록됐고, 곧 일본 사회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다시 일본어로 재구성돼 출간된다. 기획 단계부터 양국 출간까지 주목할 만한 시도다.

그러나 이들이 맞선 민족, 국가, 성, 인종 등의 주제는 사실상 너무 버거운 상대다. 이들은 오만과 편견을 유발하는 ‘경계’들에 대해 집요한 ‘공격’을 가했지만, 이 ‘견고한’ 경계들은 그동안 이런 공격을 받으며 끊임없이 방어망을 재구축해 왔다. 사회 질서와 체제 유지의 사명감에 불타는 이 방어망은 자신이 지키고 있는 피보호물의 대체물들이 나타나지 않는 한 붕괴되지 못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이 두 사람의 작업은 어쩌면 기약 없이 계속돼야 할지도 모른다.

임 교수는 “근대 역사학이 2세기 동안 해온 작업을 해체하고 새로운 역사상을 구축하는 것은 실로 엄청난 작업”이라며 “먼저 해체를 지향하는 글을 써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철저히 분석하고 발언하면 대부분 서로의 생각이 만나는 접점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카이 교수의 말은 매우 희망적이다. 역시 함께 몸과 마음을 맞대고 서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때 해결책도 나오게 된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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