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옛 할머니들의 삶과 한

  • 입력 2003년 5월 9일 17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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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세월을 견뎌온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의 절절한 ‘인생 고백담’에는 쉽사리 얻을 수 없는 삶의 진리가 진하게 배어 있다.사진제공 디새집
모진 세월을 견뎌온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의 절절한 ‘인생 고백담’에는 쉽사리 얻을 수 없는 삶의 진리가 진하게 배어 있다.사진제공 디새집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여자 이야기/유동영 구술정리 허경민 사진/189쪽 8500원 디새집

손에 흙도 안 묻혀 보고 물도 안 묻혀 보고 공부만 하다 시집가는 현대 여성들이 읽으면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어이없고 엽기적이리만치 슬프고, 그러나 너무도 따스한, 할머니들의 삶의 이야기가 나왔다.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여자이야기’가 그것이다. 1920, 30년대에 태어난 한국 여성이라면 누구의 삶이라도 다 ‘책 한 권으로는 모자랄’ 기막힌 사연을 지니고 있겠지만 이 책에 실린 전국 각처 여섯 할머니의 삶은 정말 ‘책 한 권으로는 모자랄’, 완전히 페미니즘 이전을 살아온 우리나라 옛 여성의 대표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의 아름다움은 그런 슬픈 사연의 풀어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슴 속에 서리서리 묻어둔 사연들을 사투리로 풀어내는 할머니들의 구술체의 말맛과 그 토착의 사투리들은 오늘날 텔레비전이 열심히 보급하고 있는 표준말에 비할 때 가히 ‘외래어’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뭐랄까, 그 입말(口語)의 말맛은 지금 막 시루에서 꺼낸 김이 무럭무럭 나는 쫀득쫀득한 인절미의 맛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할머니들의 육신만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사와 한(恨)까지를 다 담아낸 사진도 일품이다. 허경민 유동영 두 분의 구술 정리와 사진으로 만들어진 이 책은 이 땅 여성들의 ‘구술 자서전’이자 또한 민속학적, 인류학적 자료의 보물단지이다.

딸을 하나 낳고 둘째를 임신했을 때 남편이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끌려간 후 사망해 과부가 되었고 8년 동안 무서운 시어머니 아래서 모진 시집살이를 하다가 한동네에 자식을 못 낳는 손씨의 부탁으로 그 집 작은마누라가 되어 딸 하나 아들 셋을 낳고 50년을 큰어매, 작은어매로 불리며 한 동네에 함께 살아온, 그래도 하내(할아버지)가 죽을 때는 자기한테 와서 죽었다고 강조하는 금산댁 할머니. “냅도불어 죽어불게. 얼마나 미워야. 저 당신 자글자글한 당신이야.” 그래도 ‘그 자글자글하도록 미운’ 큰어매가 죽었는가 살았는가 하루 한번은 가본다는 그녀. “나도 편하게 사랑받으믄서 살고 싶었지”라고 말하는 강원도 안평마을 사는 이씨 할머니, “우리가 사랑을 아나, 결혼식 하라칸케 한기지”라고 말하는 아홉 살 때 민며느리로 가서 죽어라 일하다 열여섯에 혼례랍시고 올리고 평생 밭일하며 살아온 충청도 물한마을 이씨 할머니, “사는기라 살고, 삼신있응께 자슥들 놓고”라고 말하는 경상도 구수마을 이씨 할머니. 할머니들은 구구절절이 책에서는 못 배우는 진리의 편린들을 가슴 물레에서 자아낸다.

“시방 사람들 같으문 앙당앙당하지만 그적엔 못 그러제. 잘못한 거이 없어도 잘못했다 그러고 그른 기 시집살이제.” “나 혼자 같으문 몬 딱 잠그고 가믄 되는디 어매가 계싱께 내가 무엇을 해드리고 가드래도 잡숫는가 안 잡숩는가, 식어빠지고 식어빠져서 잡숩지는 않는가, 꺽정이 태산이여. 꺽정이 태산같당께. 어디 일을 가나, 어디 저 육지를 가나, 꺽정이 태산이유.” 대소변도 못 가리는 아흔다섯 살의 어머니를 걱정하여 아무 데도 못가고 그저 맴돌고만 있는 예순여섯 살의 깊은금 마을 정씨 할머니. 이 할머니들에게 ‘자아실현’이나 ‘사랑, ‘양성 평등’ 같은 말은 멀어도 너무 멀어 보이지만 그래도 마음 깊은 곳에 따끈따끈하고 고실고실한 사랑의 떡시루가 활활 살아있어 ‘아, 이것이 인간이구나’라는 뜨거운 대목을 몇 개나 만나게 된다. 할머니, 당신들은 우리나라 부엌신이시고 산신(山神)이시고 흙신이십니다. 오래 오래 사셔요.

김승희 소설가·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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