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영균/한반도 '엄청난 폭풍' 속으로?

  • 입력 2003년 5월 4일 18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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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반도 전문가인 돈 오버도퍼 존스홉킨스대 교수가 엊그제 놀랄만한 발언을 했다. 한반도가 ‘엄청난 폭풍(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우려된다는 것이다. 그는 “50년 동안 한국 문제를 다뤄왔지만 지금처럼 한국 상황에 대해 걱정한 적은 없다”고 했다.

몇 해 전 국내에서 상영된 할리우드 영화 ‘퍼펙트 스톰’의 장면을 떠올리면 놀랍다기보다는 경악스럽다고 해야 옳다. 실화를 토대로 한 이 영화에서는 대서양 북부 한 어장에서 세 개의 폭풍이 합쳐져 위력적인 태풍이 만들어진다.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태풍이 바로 퍼펙트 스톰이다.

거대한 소용돌이를 돌파하려는 자그마한 어선의 선원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목숨을 건 사투였지만 결과는 참담한 침몰이었다.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거대한 폭풍이 가로막고 있는 데도 그들이 돌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위기에 대한 몰이해와 욕망과 준비부족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워싱턴 포스트 특파원으로 일했고 최근 한국을 방문했던 오버도퍼 교수는 아마도 지금의 한반도 상황이 영화 속의 작은 어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음직하다. 한국인들이 북한의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북한이 항상 핵무기를 원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북한과 미국이 견해를 바꿀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남한의 20, 30대 젊은이들이 북한의 위협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놀랍다고 했다.

북한의 핵무기를 위협으로 보지 못하는 젊은이들도 문제지만 그들만의 탓으로 돌리는 일 역시 무책임하다. 전쟁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이 최근 몇 년 동안 북한을 ‘적’이라기보다는 ‘동반자’라고 강조했던 분위기 속에서 북한의 핵을 어찌 위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통일이 되면 북한의 핵무기는 우리 것’이라는 낭만적인 착각을 부지불식간에 불어넣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진정한 위기는 위기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데에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에 나라밖에서는 한국의 경제위기를 거론하고 있는 데도 당시 정부는 위기가 아니라고 고집했었다.

최근 중국 정부는 남쪽 광둥(廣東)지방에서 사스가 창궐하고 있는 데도 ‘매년 발생하는 병’이라는 식으로 감추기만 하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 뒤늦게 실상을 밝히고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사스와의 전쟁’을 선언했지만 이로 인한 피해는 가히 ‘퍼펙트 스톰’급이다. 심지어는 체르노빌 핵누출 사고를 감추려다가 종국에는 체제붕괴로 치달았던 옛 소련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진단마저 나오고 있다. 반면 사실을 은폐하지 않고 초기에 강력하게 대응했던 베트남의 사례는 위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지구촌은 지금 곳곳에서 위기를 겪고 있다. 불과 50일 전만 해도 큰소리치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린 게 오늘의 현실이다. 미국의 우방이던 사우디아라비아와 터키에서 하루아침에 미군이 떠나는 세상이다. ‘한반도가 퍼펙트 스톰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한반도 위기론도 그래서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오버도퍼 교수의 분석을 빌린다면 위기를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북한의 핵욕망을 막을 수도 없고 북한과 미국의 견해를 바꾸는 것도 우리로선 쉽지 않다. 하지만 북핵의 위험성을 보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전교조의 ‘반미교육’에 대해 세 차례나 달리 언급하면서 불분명한 자세를 취한 것은 이런 젊은이들을 외면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오늘의 퍼펙트 스톰이 영화 속의 얘기인지, 현실인지 정확히 말해주어야 한다.

박영균 국제부장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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