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하이브리드 세상 읽기'

  • 입력 2003년 5월 2일 17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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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 세상 읽기/홍성욱 지음/223쪽 8500원 안그라픽스

서울대에서 과학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1994) 후 캐나다 토론토대에서 과학기술사를 연구 강의하고 있는 저자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전공뿐 아니라 한국 국적과 학위를 가지고 외국에서 살아가는 그의 생활 자체가 ‘잡종적’이다.

이를 반영한 것인지 그는 1997년 계간지에 ‘잡종, 그 창조적 존재학’이란 글을 발표하고 이듬해에 에세이집 ‘잡종, 새로운 문화 읽기’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잡종(雜種·hybrid)’이란 한국사회에서 ‘순수성을 상실한 저급한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순수 혈통의 단일민족이란 ‘환상’ 속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잡종’이란 그저 저열하거나 생소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자신의 ‘잡종적’ 삶을 통해 확인한 사실은 ‘순종 약세, 잡종 강세’라는 진화의 법칙이었다. 이런 사실은 월드컵 4강을 이룩한 축구 국가대표팀을 비롯해 프로 야구 농구 축구팀, 실리콘밸리의 기업들, 다국적 기업들 등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저자는 그동안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잡종적’으로 살면서 인터넷 매체를 통해 연재해 온 가상의 편지 형식 칼럼을 비롯해 다양한 매체에 기고해 온 글들을 다듬고 정리해 책으로 묶었다. 비연속적인 시간에 다양한 매체를 통해 발표된 ‘잡종적’ 글들은 각종 이미지와 결합되어 ‘안그라픽스’의 비균일적인 편집으로 책이 됐다.

그에 따르면 잡종의 장점은 우선 “기존의 양분법적 사고를 뛰어넘어 스펙트럼으로 사고한다”는 것이다. 잡종은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섞을 수 있는 ‘창조성’의 근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잡종적 지식인’은 복잡한 위험 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잡종은 힘 있는 자들이 그어놓은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존재”다. 또한 이런 잡종은 주류뿐 아니라 주변인에 대해서도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낸다.

이 책에는 잡종의 정의와 그 기능에서부터 대학과 인문학을 위한 ‘잡종적’ 제언, 그리고 영화와 과학기술, 세상을 읽는 잡종적 시각 등이 담겨 있다. 저자는 수학과 철학의 잡종적 만남이 이룩해 낸 서양의 지적 혁명을 이야기하고, 양시론(兩是論)과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스펙트럼적 시각으로 쟁점을 바라보는 잡종적 사고를 제시한다. 순수성을 고집하는 인문학의 본질에서 실용성을 찾아내고,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를 보면서 신체를 가진 사이보그와 신체가 없는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며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을 다시 고민하기도 한다.

글들 사이사이에는 잡종적 사고가 만들어내는 아이디어와 저자가 아직 풀지 못한 과제들이 넘쳐 흐른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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