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삶 눈물겨운 풍경

  • 입력 2003년 4월 18일 17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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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구효서. 사진제공 세계사
작가 구효서. 사진제공 세계사
◇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구효서 지음 /356쪽 9500원 세계사

생멸의 굴렁쇠를 굴리며 달리는 일은 인간의 숙명. 수없이 맞닥뜨리는, 있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 생겨나는 것들의 존재를 뒤돌아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다.

구효서(46)의 새 소설집 ‘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는 눈을 뜬 채 꾸는 꿈같다. 작가가 그려내는 소소한 일상은 익숙하면서 또 낯설다. 늘 다니던 길에서 어느날 문득 눈에 들어온 낡은 간판처럼. 그것은 있었지만 곧 없는 것이었고, 한순간 다시 나타나는 것.

작가는 인생의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삶의 한가운데로 안내할 뿐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을 취재하기 위해 미국에 들른 정길은 가이드를 맡은 미르라는 여대생을 만나게 된다. 정길은 미르를 가이드라기보다 ‘신이 나서 함께 여행하는 가족’ 같다고 느낀다.

우연히 조우한 한 인디언을 따라 정길과 미르는 인디언 마을에 들른다. 그곳에서 인디언들이 ‘자미자미 오 테’라 부르는, 나무속에서 알 상태로 숨어 있다가 60년 만에 툭 튀어나왔다는 풍뎅이를 본다.

아버지의 부재를 ‘아침에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일’처럼 받아들이는 미르를 통해 정길은 사소한 일상처럼 기억에 흐릿하게 남은 첫사랑의 역사를 떠올린다. 청춘의 한 시절,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것이 고작 ‘할머니의 팬티’였다는 사실은 심각한 오늘이 대수롭지 않은 과거로 빛바래고 마는 인생사와 다름없다.

느닷없이 존재를 드러낸 풍뎅이처럼, 미르의 어머니가 남긴 휴대전화 메시지는 미르와 정길이 부녀 관계라는 것을 알린다.

“미르를 키운 것은 저도 당신도 아니에요. 세상의 바람과 구름과 하늘, 그리고 땅 위에 돋는 식물과 꽃들, 무엇보다 세월이었지요. 그것으로도 사람은 얼마든지 멋지게 자라죠.…”(‘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

아버지 같은 삶을 반복하는 우영에게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아버지의 전화가 걸려오고(‘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분명히 동창들과 나무뿌리에 걸터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눈 지가 엊그제인데 그 홰나무가 이태 전에 베어졌다는 것이 확인된다.(‘검은테떠들썩팔랑나비’)

구효서의 이야기들은 책장을 덮는 순간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퍼즐 조각이 된다. 전작들과도 고리를 이어간다.(‘그녀는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에서 남편이 선물한 자주색 스카프가 싫어 가출한 여자는 이번 소설집에 실린 ‘철갑나무가 있는 광장’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는 집을 떠나 로마로 향하는 비행기를 탄 것이다)

구효서는 바둑을 두는 이들이 바둑판 속에서 인생과 세상을 읽듯 소설을 쓰는 사람도 소설 속에서 그럴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제는 ‘삶 자체의 눈물겨운 풍경들에 무작정 발끝을 채여 덩달아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졌을망정, 생의 비의를 파헤치려는 치열성 따위에는 점차 미련이 없어졌다’.

치열한 고민에 빠진 작가는 불행하고 독자는 행복하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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