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사랑이 없는 성-철학적 탐구'

  • 입력 2003년 3월 28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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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길의 목판화 '이브' (1926년)
에릭 길의 목판화 '이브' (1926년)
◇사랑이 없는 성-철학적 탐구/러셀 바노이 지음 황경식 김지혁 옮김/435쪽 1만6000원 철학과현실사

섹스는 본래 철학적 탐구와는 거리가 먼 주제였다. 전통적으로 철학의 주제는 이성과 신앙이었다. 중세를 지나서야 사랑과 증오와 같은 인간의 감정이 주제가 되기 시작했고 근래에 와서야 비로소 섹스가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등장했다. 그것도 사랑의 일부로서의 섹스가 아니라 사랑이 없는 섹스, 그 자체로서의 섹스가 주제가 된 것은 상대적으로 더욱 최근의 일이다.

흔히 ‘인간은 섹스 그 자체가 아니라 관계성 친밀함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거나 ‘사랑이 없는 섹스는 테크닉에만 집착하는 비인격적인 것인데 반해 사랑이 있는 섹스는 전인격적’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상식적 견해에서 벗어나 사랑이 없는 섹스에 대해 철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나는 애인에게 즐거움을 주는 데 고심하고 있어서 나 자신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리고 내 애인도 속으로 ‘그녀는 즐기는 걸까? 아니면 단지 나를 기쁘게 해주려고 하는 걸까?’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가끔 나는 하기 싫은 데도 억지로 해야 한다. 내가 만일 거절한다면 나는 이기적이고 경솔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하기 싫은 것을 알면서도 요구하는 그가 이기적인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모르는 사람과 섹스를 할 때는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이런 고민을 해본 사람이라면 사랑이 없는 섹스가 사랑이 있는 섹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아하고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과 ‘조야하고 이기적인 단순한 욕정’ 사이의 이분법은 과장된 것이다. 그 차이는 커피를 직접 즐기는 사람과, 크림 설탕 등을 넣어 즐기는 사람의 차이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랑이 있다’ ‘사랑이 없다’라고 할 때 이 사랑은 도대체 무엇인가. ‘첫눈에 반한 사랑’은 소설의 오랜 주제다. 춘향과 이도령이 그렇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렇다. 그러나 합리주의자는 그들의 사랑은 단순한 끌림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은 연인이기 이전에 친구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면 상대방이 진정으로 자신의 연인으로서 가치가 있는지 또는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동반자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현실주의자는 낭만주의자의 사랑을 단순한 끌림이라고 하며 낭만주의자는 현실주의자의 사랑을 일종의 깊은 우정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섹스 그 자체로부터 사랑을 바라보면 사랑은 완전히 달라 보인다. 사랑이라는 것은 섹스로 가는 데 도움을 주는 인간세계의 독특한 최음제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사랑은 유일한 최음제도 아니고 가장 강력한 최음제도 아니다. 그건 낭만주의자들의 끌림에 가깝지만 그들이 부여하는 만큼의 신비로움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 없는 섹스는 테크닉을 추구한다. 테크닉은 종종 묘사되는 것처럼 그렇게 냉정한 것이 아니다. 테크닉의 발휘는 자발적으로 수행된다면 테크닉 그 자체가 일종의 사랑하는 현상이 될 수 있다.

세상에는 단순한 섹스에 만족하는 커플이 수없이 많다. 그들은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면서 일생을 보낸다. 저자가 보기에 이상한 것은 오히려 그들이다. 그들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섹스를 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저자는 냉정하게 섹스는 일종의 상호이용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조종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자기 만족을 즐기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도 다른 사람에 의해 조종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저자는 뉴욕주립대(버펄로대)에서 10년 넘게 ‘사랑과 성의 철학’이라는 강좌를 맡았다. 책에는 학생들의 보고서가 중요하게 인용되고 있다. 번역은 황경식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맡았다. 황 교수는 이 책을 교양철학강좌 ‘성의 철학과 성윤리’의 교재 중 하나로 쓰고 있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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