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오보와의 전쟁'은 기자 몫

  • 입력 2003년 3월 19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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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서석재(徐錫宰) 당시 총무처 장관이 기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전직 대통령 중 한 사람이 4000억원대의 가명 계좌를 갖고 있다”고 발언했다. 파문이 일자 그는 “실언(失言)”이라며 부인했지만 그의 말은 결국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의 구속으로 이어졌다.

이창동(李滄東) 문화관광부 장관이 ‘홍보 업무 운용 방안’에서 이 같은 ‘회식’을 자제토록 했다. 영화 감독 출신인 이 장관이 회식을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지만 기자들에게 회식은 취재원과의 다양한 접촉 중 하나다. 기자들이 소주를 얻어 마시기만 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기자는 취재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 기자는 궁극적으로 국민의 알 권리를 채워 주는 역할을 위해 이 같은 노력을 한다.

문화부 기자 9년째다. 그동안 문화부나 방송사의 공식 발표나 보도 자료에만 의존해 ‘큰 기사’를 쓴 적은 한번도 없다. 오히려 그 발표의 행간에 숨은 의도를 들췄던 기사의 사회적 울림이 더 컸다.

보도자료를 옮기기만 하는 것은 ‘받아쓰기 저널리즘’으로 그 발표 내용에서 파생하는 문제에 접근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절반의 오보’다.

이 때문에 기자들은 공식 발표 자료를 두고 매일 ‘오보와의 전쟁’을 벌인다. 정책 결정 과정의 문제점이나 대안, 외국의 사례 등을 따져보고 전문가의 조언도 듣는다. 정책 관계자들과 자주 접촉하려는 것도 오보의 소지가 없는 정확한 팩트와 그 배경을 확인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일 뿐이다.

미국도 다르지 않다. 브리핑제가 보편화된 미국에서 심층 탐사 보도가 더 발달했다는 점은 역으로 ‘공식 발표’의 한계를 말해 준다. 이 장관은 기자의 사무실 방문 취재를 제한하고 직원들에게 취재에 응한 내용을 보고하도록 ‘당부’했다. 그는 “오보 예방 조치”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이 기자의 취재활동을 제한하면서 ‘받아쓰기 저널리즘’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이 장관이 정말 인식하지 못하는지 묻고 싶다.

이 장관은 “특종은 쓰레기통을 뒤져서 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다. 권력으로부터 정보가 완전 차단될 때 기자들은 그 이상도 한다. 박종철 고문 치사 등 현대사의 고비마다 진실을 밝혀낼 수 있었던 것도 ‘쓰레기통’의 단서나 언론을 신뢰하는 시민들의 제보 덕분이었다.

특히 취재 행위의 공개를 바라는 것은 ‘기사를 미리 알려 달라’ ‘비판하지 말라’는 주문과 같다. 비판 기사를 미리 알려 주는 기자는 사이비로 보면 틀림없다. 이 장관은 “방안의 취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답답하다”고 말하지만 언론학자들은 “이 장관이 비판 없는 신문을 만들려고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장관의 ‘방안’은 정부가 선언한 ‘오보와의 전쟁’의 신호탄이다. 이 장관은 자신의 언론관에 대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분신” “나와 대통령의 생각은 같다”고 계속 말하고 있다. 이로 미뤄 보면 이 장관의 ‘방안’은 곧 ‘참여정부’의 방안이다.

‘오보와의 전쟁’은 언론의 몫이다. 오보 하나에도 독자들의 신뢰는 순식간에 떨어진다. 정부는 “이 장관의 방안이 설익었다”(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성명서)는 지적에 귀를 기울이고 정보 공개의 투명성을 높이는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 그것이 기자들 스스로 시시각각 피를 말리며 치러내는 ‘오보와의 전쟁’에서 오보를 솎아낼 수 있도록 돕는 길이다. 오보는 기자가 잡는다.

허엽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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