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류지태/정치권부터 개혁을

  • 입력 2003년 3월 11일 18시 54분


코멘트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의 갈등. 듣기에 따라서는 전통문화와 서양문화의 갈등같이 보이는 이 미묘한 다툼이 지난 일요일 지상파 방송에서 중계된 토론의 최종 결론인 듯하다.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대통령과 평검사의 대화,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인사권자에게 거침없이 쏟아낸 한국의 검사들. 대통령의 검찰인사권을 인정하는 세계적 추세를 강조하는 대통령에게 우리나라에서만은 검찰인사권을 검찰총장에게 부여해 달라는 한국적인 요구들, 검찰 수뇌부를 직설적으로 불신하는 한국적 대통령과 정치인들을 불신하는 한국적 검사들. 검찰이 정치권에서 독립해 세계적 수준의 검찰이 되기를 주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검찰 수사에 영향을 미치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한국적 정치인들.

▼‘검찰과의 토론’ 스스로 자초▼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복잡한 이러한 갈등을 이해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해 보인다.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제도 운영이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이유로 그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는지에 대한 성찰을 제대로 한다면, 의문은 저절로 해결될 것 같다. 개혁은 잘못된 제도운영을 제도이념에 맞게 개선하자는 것이며, 이러한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혁의 필요성 자체가 아니라, 개혁이 필요한 원인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는 불필요하게 갈등구조가 연출되고 있다. 검찰개혁을 바라보는 시각차는 이러한 원인 분석에 기인하는 것 같다.

검찰은 물론 정치권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그러나 검찰이 지금까지 정치권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것은, 역설적으로 정치권이 검찰로부터 독립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검찰의 인사를 남용해 온 전례가 검찰의 정치화를 가속화했고, 특정사건 수사에 정치권을 이용하거나 압력을 행사해 온 관행이 오늘날 한국적 검찰 문제를 만들어 냈다는 원인 분석에 동의한다면, 검찰의 개혁 방향도 여기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한국적 정치풍토를 더 이상 믿지 못하는 한국적 검사들에게 정치권에 의한 검찰개혁을 강요하는 모습은 그래서 조금은 낯설어 보인다.

그렇게 불신의 대상이 된 검찰 수뇌부는 결국 모두 검찰권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검찰에 의해 불신의 대상이 된 정치권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사뭇 궁금해진다. 집권당의 한 인사가 검찰 수사와 관련해 수사 외압을 행한 의혹을 받고 있다는 보도를 들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정치권에 의한 검찰 인사 개혁이 얼마나 명분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정치권의 개혁이 선행되지 않고서 검찰개혁이나 재벌개혁, 언론개혁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면, 개혁의 명분은 주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검찰은 이제 개혁의 방향으로 들어선 듯하다. 그러나 검찰의 중립성을 위태롭게 하는 정치권의 외압이란 구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이번의 검찰개혁은 과도기적 인적 청산작업에 불과하게 될 뿐이다. 그렇기에 언론에서 제기하고 있는 정치권의 수사 외압 의혹에 대해서는 엄격한 책임이 따라야 할 것이다.개혁은 잘못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잘못된 것은 그것이 관행이라 하더라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주관적이고 그 개혁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다면, 개혁의 취지는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집권당인사 ‘외압의혹’이라니▼

또한 개혁 과정에서는 상대방을 그저 불신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개혁을 유도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으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기준으로 형평성을 유지하면서 투명한 절차에 따라 개혁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정치권 스스로는 이중잣대에 의해 보호받으면서 다른 집단에 대해서만 개혁을 강요한다면,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검찰개혁을 토론하기 위해 대통령까지 방송에 나와 ‘상상을 초월한 이야기들’을 들어야 하는 고충은, 돌이켜보면 정치권이 자초한 일이다. 정치권의 개혁을 논의하지 않고서 다른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상상을 초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류지태 고려대 교수·법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