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송수남/사회의 어른 ‘선비’가 그립다

  • 입력 2003년 2월 28일 18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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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사람은 살찌울 수 있지만 속된 선비는 고칠 수 없다.”

이 말은 중국의 유명한 시인이자 화가였던 소동파가 한 말이다. 평생을 대나무와 함께하며 청빈하고 올곧은 삶을 살았던 소동파의 대나무 사랑은 유명하다. 동양화의 소재로도 널리 사랑받아 온 대나무는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선죽교에 났다고 전해지는 정몽주의 혈죽(血竹)이나 민영환 열사의 집 구들장을 뚫고 자라났다는 대나무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대나무의 상징성을 강조하는 이야기와 다름없는 것이다.

▼물질에 가려진 정신적 가치▼

지조와 절개는 바로 선비의 상징이다. 물론 선비는 전통시대의 낡은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는 고리타분한 인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비는 여전히 한국 지성인의 전형이며, ‘선비 정신’은 계승해야 할 값진 우리의 정신적 유산이라 생각한다. 물질만능과 천박한 자본주의에 물든 오늘의 세태에서 새삼 고고한 ‘선비정신’을 들먹이는 것은 씨가 안 먹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세태가 그러하기 때문에 더욱 선비를 찾고 선비정신을 힘주어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격변의 기로에 서 있다. 급변하는 사회적 상황은 전에 없던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세대는 점차 교체될 것이며, 새로운 가치관에 의한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게 될 것이다. 지난 격변의 시대를 온몸으로 헤쳐 나온 기성세대는 필연적으로 점차 역사의 뒤편으로 그 자리를 옮기게 될 것이다. 넘쳐나던 열정과 분출되던 에너지는 예전과 같을 수 없겠지만, 세월을 따라 축적된 경륜은 차분히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관조의 여유를 갖게 했다. 비록 치열한 현장의 일선에서 한 걸음 물러났지만 여전히 ‘어른’으로서의 의무와 역할이 남아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는 어른이 없다. 어른의 헛기침 소리 하나에도 흐트러졌던 질서가 바로 자리를 잡고, 곡절 분분한 시비도 곧 잦아들게 되는 것이 뼈대있는 집안의 법도다.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함은 어쩌면 어른들의 어른답지 못한 처신의 소산일 것이다. 물질 만능의 사회적 분위기와 출세지향적인 가치관이 팽배하던 지난 시절, 기성세대는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 왔다. 응당 지켜야 할 정신적 가치와 도덕적 덕목은 내팽개친 지 오래였을 뿐 아니라, 허황한 욕심과 이기적인 아집을 만족시키기에 급급했다. 어른은 어른으로서의 덕목이 있게 마련이다. 욕심과 아집은 천박하고 추한 늙은이를 만들 뿐이다.

우리 민화 가운데 문자도(文字圖)라는 것이 있다. 효, 제, 충, 신, 예, 의, 염, 치 등의 문자를 회화적으로 장식해 8폭의 병풍으로 꾸민 것이다. 이를 사대부의 사랑방에 펼쳐 놓고 마음을 다스리는 거울로 삼았다. 그중 염(廉)에는 청렴과 절제를 의미하는 게가 그려져 있다. 게는 세상에 나설 때와 물러날 때를 잘 알아 처신한다는 출처지리(出處之理)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치(恥)는 의롭지 않은 행동을 스스로 부끄러워한다는 뜻이다. 나설 때와 물러날 때를 가려 행동하고,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할 줄 아는 것, 또 만약 이러한 것들이 어긋났을 경우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반성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염치이다. 비록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염치 정도는 있어야 할 것이다.

▼‘도덕과 염치’ 덕목 절실해▼

변화에는 필연적으로 일정한 혼란이 동반되게 마련이다. 밝고 냉철한 지혜와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깊이 있는 안목은 혼돈의 시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다. 이는 경륜과 식견을 바탕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는 도덕적 덕목을 지닌 통찰력 있는 어른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새삼 ‘선비정신’을 상기하고 염치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이러한 덕목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물질 만능의 속된 가치를 넘어 정신적 가치의 제고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오늘의 우리 사회는 분명 애타게 ‘선비’를 부르고 있다.

송수남 홍익대 교수·한국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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