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나는 시]강미정 '상처가 스민다는 것'

  • 입력 2003년 2월 21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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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정 시집, ‘상처가 스민다는 것’

올해 새로 돋은 저 눈부신 햇빛,

맨발로 뛰쳐나온 그 여자 울던 자리에

폴짝폴짝 깨금발로 뛰어온 아이 꼬옥 안고

한참을 그렇게 서있던 그 자리에

새로 돋은 연초록 나뭇잎 사이로

포롱 포르롱 내려와 연신 꽁지깃을 까딱거리네

아이 손잡고 들어간 저 맨발의 여자도

올해 새로 돋은 아픔을 걷는 것이리

―‘햇빛 구경’ 중

극장에서 나와 햇빛 속으로 들어가면 눈이 부셔 한동안 멈칫거리던 기억이 있다. 강미정 시인이 최근에 펴낸 시집 ‘상처가 스민다는 것’(천년의 시작)에 실린 ‘햇빛 구경’의 앞부분을 읽는 동안 내내 극장에서 나온 듯했다. 시에 등장하는 맨발로 뛰쳐나온 여자도 그러했으리라. 그녀가 들어가 있던 극장, 즉 가정(가정은 ‘극장’일 때가 많다)과 봄날의 눈부신 햇빛은 극도의 부조화를 이룬다.

하지만, 앞에 인용한 시는 맨발의 여자를 관찰하는 ‘나’(화자)에 의해 반전된다. ‘나’는, 환한 봄날을 배경으로 한 비극적 삽화를 ‘눈부신 아픔’이라고 명명하며 자기화한다. 맨발의 여자와 ‘나’ 사이는 멀지 않다. 시인은, 봄날이 언제나 ‘올해 새로 돋은’ 것이듯이 우리들의 아픔(상처)도 늘 새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부조화가 조화를 이루는 순간이다.

강미정의 시는 눈부신 상처의 시다. 시인의 모순어법은 어머니의 딸인 ‘나’의 자의식에서 발생한다. 어머니를 닮을 수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부정할 수도 없는 딸은, 꽃이나 햇빛, 혹은 아이와 같은 ‘너무 밝아 속살이 아린’ 이미지들과 친밀해진다. 밝고 환한 것들, 새로 돋아난 것들 위를 맨발로 걸어가며 아파하는 시, 그것이 ‘눈부신 상처’의 시다.

시는 새롭게 보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새롭게 말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각이 꽃과 햇빛에서 상처를 발견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발성법은 그 상처를 환한 봄날 앞에 위치시키며 풍부해진다. 모순어법에 바탕한 도발적인 시선과 육체성이 강한 발성은 다름아닌 감각에서 나온다. 시인의 감각은 감각을 통해, 감각을 향해, 감각과 어우러지고 싶어한다. ‘벌어진 꽃나무의 상처를 핥아주는 햇빛’(벚나무) ‘베인 내 손끝에서 고통이 켜졌습니다’(손을 베이다) 등에서와 같이, 시인은 도처에서 신체언어를 동원해 ‘감각의 제국’을 건설한다.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눈부시고 뜨겁고 아프고 선명한 감각의 제국에 입국하는 것이다.

시인이 보기에 이 세상은 ‘아픔을 모르는 아픔뿐’인 세상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 살아 있는 죽음의 나날들, 눈이 부셔서 캄캄한 이 ‘봄날’을 어떻게 통과하겠다는 것인가. 시인은 짐짓 한 걸음 물러선다. 물러서서 둥글고 따뜻하고 느리고 고요한 것들의 손을 잡고 있다. ‘따뜻해져야 좋은 음을 내는 악기’가 되려는 것이다. 따뜻한 악기에서 나오는 음악이 절실해지는 겨울의 끝이다.

이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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