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문명호/반전시위

  • 입력 2003년 2월 17일 1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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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가 이란의 테헤란에서 회동했다. 독일 패망 1년반 전이었다. 주요 의제는 프랑스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는 문제였다. 소련의 스탈린은 북프랑스 상륙작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영국의 처칠은 지중해작전을 원하고 있었다. 처칠이 프랑스에서의 전투는 수만명의 병사들을 불필요하게 희생시킬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입니다. 수천명이 죽으면 그것은 통계입니다”라고 대꾸했다. 전사자 2700만명, 민간인 희생자 2500만명. 이 전쟁이 남긴 참혹한 기록은 과연 인류에게 통계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일까. 지금도 전쟁은 끊이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테헤란회담 후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은 44년 6월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켰고, 이듬해 5월 독일을 패망시켰다. 파시스트들을 무찌른 일에 자부심을 가질 법도 했다. 역사가들은 그런 의의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으로서뿐만 아니라 전쟁의 잔인함과 무익함과 어리석음을 보아온 사람으로서 전쟁을 증오한다.” 전쟁 영웅에게조차 전쟁은 누가 왜 일으키고, 누가 승리했는지를 떠나 부질없는 짓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미국은 이라크에 대해 ‘평화를 위한 전쟁’을 벌이려 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내세우는 명분을 그대로 믿고 있지는 않다. 15일 지구촌의 수십개 국가에서 1000만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해 반전시위를 벌였다. 60년대 베트남전 반대 시위 이후 최대 규모라고 한다. 9·11테러가 있었던 뉴욕에서도 20여만명이 시위에 참가했다던가. 그런데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아랑곳도 하지 않는 눈치다. “부시 대통령은 이러한 시위가 미국의 유서 깊은 전통이며 민주주의의 강점이라고 믿고 있다”고 백악관 대변인은 전했다. 미국민의 다수는 이 전쟁을 지지한다고 믿기 때문일까.

▷베트남전은 미국이 주도한 잘못된 전쟁이다. 그러나 그때는 세계가 크게 동서 진영으로 갈라져 있었다. 당연히 반전운동에는 다른 진영의 수장인 소련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도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세계인의 반전 시위 배후에 이라크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베트남전 당시 미군 병사들의 헬멧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우리는 내키지 않는다. 자격 없는 자들에게 끌려, 불쾌한 자들을 위해 불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 반전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끝내 전쟁이 날 경우 미군 병사들이 이번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문명호 논설위원 munmh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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