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김상환/'아버지'와 '모래시계'

  • 입력 2003년 1월 28일 18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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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한 아버지가 가족의 모든 여자들을 독차지하고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불만을 참지 못한 아들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여자들을 빼앗기로 한다. 하지만 부친을 살해한 후 아들들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동족의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기로 하고, 한 동물을 정해 살아 있는 아버지처럼 숭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일마다 그 동물을 죽이고 피를 나누어 마시면서 자신들의 죄를 반성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다짐한다.

이 이야기는 토템과 터부, 근친상간 금지와 족외혼 등을 비롯한 윤리적 규범 일반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트가 고안해 낸 신화다. 하지만 이 신화의 백미는 아버지가 죽는 장면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장면이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후회와 애도를 통해 숭배의 대상으로 부활한다. 자식이 흘리는 속죄의 눈물이 클수록 아버지는 형이상학적 인간으로 이상화되고, 그 결과 어떤 후손도 거역할 수 없는 영원한 권위를 누리게 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한 사회의 규범적 전통이 시작되는 뿌리에는 이런 이상화된 아버지가 자리한다.

▼한번은 겪어야 할 세대갈등▼

요즘 세대갈등이 사회문제로 불거지고 있다. 자신의 상식을 저버린 자식의 정치적 선택 앞에서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패배감에 움츠러드는 아버지들의 목소리를 자주 전해 듣는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신화를 되돌아보면 이런 세대전쟁도 우리 사회가 한 번은 겪어야 했을 사건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최초의 부자(父子) 갈등이 표출된 사건이 아닐까.

물론 우리 사회는 세대갈등을 이번에 처음 경험한 것은 아니다. 개화기 이래 한국 역사는 수많은 세대갈등으로 점철되어 왔다. 가령 수구파와 개화파, 식민지 세대와 한글 세대의 알력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례를 떠나 압축성장을 통해 오늘에 이른 우리 사회의 변동과정은 연속성보다는 불연속성을 더 많이 띠었고, 앞 세대와 뒤 세대 사이에는 언제나 메우기 어려운 문화적 차이가 있어 왔다. 그러므로 요즘의 세대충돌은 우연하고 일회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이고 반복적인 현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구조란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기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아버지와 자식은 있어도 그 둘간의 관계는 없다고까지 할 수 있다.

가령 5년 전 이맘때 유행하던 말을 기억해 보자. 그것은 ‘고개 숙인 아버지’였다. 외환위기가 있었던 그 전 해에는 ‘아버지’라는 소설이 기죽은 가장들의 위안이 되면서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세웠다. 산업화 세대의 전형인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자수성가해 집안을 일으켜 세웠지만 가족사진에도 자식들의 졸업사진에도 빠져 있는, 따라서 자식의 마음에 부재하는 아버지다.

그전에는 TV 드라마 사상 유례 없는 시청률을 기록한 ‘모래시계’가 장안의 화제였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1980년대에 생산된 다른 문학작품의 주요 인물들처럼 아비 없는 자식이고, 그 자신도 자식을 잉태한 애인을 남기고 형장에서 사라진다. 산업화 세대가 자식의 마음에 자리잡지 못하는 아버지라면, 모래시계 세대는 아버지 없이 홀로 서는 자식이다. 이 둘은 고립적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두 작품이 말해 주는 것처럼, 그동안 우리 사회는 대단히 특이한 세대관계를 겪어 왔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관심했고, 자식은 그런 아버지를 없는 것처럼 간주했다. 프로이트주의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 했다. 사실 공유된 욕망이나 관심이 없다면 사랑도 증오도 없다. 애증은 유사한 감정이고 사랑과 증오는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 많은 심리학자들의 관찰결과다.

▼무관심 벗어나는 계기 삼아야▼

오늘의 세대갈등은 분명 방치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아버지와 자식이 어떤 공통의 욕망의 대상을 나누어 갖고, 따라서 서로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드러내는 사건인지 모른다. 요즘 자식 앞에 고개 숙인 아버지들은 이번의 좌절이 미래의 정상적 부자관계를 위해 치러야 하는 값비싼 대가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찾고, 모처럼 찾은 자식에 대한 관심을 계속 지켜 가기 바란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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