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권태형/한국은 정말 미군철수 바라나

  • 입력 2003년 1월 12일 18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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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장갑차 여중생 치사사건을 계기로 한국에서 반미 감정이 번져갔고, 이를 전해들은 미국 내에서는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과연 한국인들은 미군철수를 진정으로 바라는 것일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미군철수는 이번이 세 번째가 될 것이다. 과거 두 차례는 양국 모두에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했다.

120년 전인 1883년 5월 초대 미국공사 푸트가 조선에 부임했을 때 고종은 뛸 듯이 기뻐했다. 푸트 공사는 고종에게 미국이 조선인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 1882년 한미통상수호조약을 맺었다고 설명했다. 조약에는 ‘미국과 조선간에는 평화와 우호관계가 영존(永存)할 것이다. 제3국이 조약국을 학대하거나 부당하게 취급한다면 상호 중재에 힘쓸 것이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쇄국주의를 분쇄하고 조약을 종용(慫慂)한 워싱턴 정책가들은 곧 한국과 거리를 두며 친일정책으로 선회했다.

1899년과 1900년 존 해이 당시 미 국무장관이 ‘중국개방정책’을 통해 두 차례에 걸쳐 세계 강국들이 중국의 독립과 영토권을 존중할 것을 주장하자, 고종은 당시 주한 미국공사 앨런에게 조선에도 그런 개방 정책을 마련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시어도어 루스벨트 당시 대통령은 오히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이 한반도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1905년 여름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비밀 각서를 조인, 일본으로부터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일본의 한반도 소유권을 인정했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조선은 1904∼1905년 최소한 6번은 미국에 호소했다. 1905년 12월, 미국은 서울에 공관을 설립한 최초의 서방 조약국이었으나 그 뒤 가장 먼저 서울을 버린 나라가 됐다. 당시 미 공관 서기는 ‘침몰하는 배에서 쥐들이 달아나듯 우르르 도망쳤다’고 기록했다.

1910년 조선은 나라를 잃었고, 일본은 세를 확장해 결국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에 이르렀다. 2차 대전에서 미국은 4년간 일본과 싸워야 했다. 그것이 첫 미군의 철수로 한국과 미국이 지불한 대가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광복의 환호성이 한반도를 뒤덮었다. 하지만 잠시뿐, 북한에는 소련군, 남한에는 미군이 들어섰다. 남한 지도자들은 “40년 전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 넘겨줬듯이 다시 북한을 러시아에 넘겨주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한국을 신탁통치 하에 두려 했으나 반탁운동에 부닥쳤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했다. 북한에서도 같은 해에 김일성을 태두로 하는 정부가 들어섰다.

미군이 두 번째로 한국을 떠난 것은 1949년 6월과 7월 사이. 그 후 1년 만에 북한이 남침, 3년간의 전쟁에서 미군 10만3284명이 부상하고 5178명이 포로로 잡히거나 실종됐으며 3만3629명이 전사했다. 남한에서는 국군 5만명 이상이 전사했고 100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처럼 역사는 미군이 한반도를 떠날 때마다 한미 양국에 불행한 결과가 뒤따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한국인들은 미군이 철수하기를 원하는가. 또 미군 역시 한국을 떠나려는가.

권태형 미국 몬테발로대 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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