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화 국민의 정부]<2>신구주류 치열한 요직다툼

  • 입력 2003년 1월 8일 19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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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2월 당선자 시절의 김대중 대통령과 박지원 당시 당선자대변인. 박 대변인은 김중권 대통령비서실장 내정자를 비롯한 신주류의 집중견제를 뚫고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으로 DJ의 지근거리를 계속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1998년 2월 당선자 시절의 김대중 대통령과 박지원 당시 당선자대변인. 박 대변인은 김중권 대통령비서실장 내정자를 비롯한 신주류의 집중견제를 뚫고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으로 DJ의 지근거리를 계속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98년 1월 중순 어느 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당선자는 박지원(朴智元) 당선자 대변인을 일산 자택으로 호출했다.

“자네가 미국계 A사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 회사에 아는 사람이 있나.”(DJ)

“그 회사는 알지만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미국회사가 돈을 쉽게 줍니까. 사실이 아닙니다.”(박지원)

“알았어.”(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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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은 DJ 앞을 물러나면서 ‘누가 그런 보고를 당선자에게 했을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나중에 대통령비서실 상황실장이 된 장성민(張誠珉)이었다.

박지원은 마침 일산 자택에 보고차 들어와 있던 장성민을 마당으로 불러냈다. 박지원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너, 이 XX야.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나한테 한마디 물어보지도 않고 그런 걸 보고해.” 두 사람은 이날 육탄전 일보직전까지 갔다는 후문이다.

김대중 정부 초기 여권 내에서 신실세로 새로 부상한 신주류와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한 구주류간의 세력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였다.

97년 대선 직후인 12월26일 이종찬(李鍾贊)을 위원장으로 한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차기 정부의 청와대 요직을 둘러싸고 신구주류는 본격적인 암투를 벌였다. 그 가운데서도 핵심은 공보수석과 정무수석 자리였다.

특히 공보수석 자리를 놓고 박지원과 김한길 인수위 대변인간에 벌어진 힘겨루기는 양 진영의 대리전 양상으로 비화됐다. 정동영(鄭東泳) 국민회의 대변인-김한길 인수위 대변인-장성민 등 신주류 쪽 사람들은 박지원의 공보수석 발탁을 견제했다. 동교동 구주류와 가까운 박지원의 성향으로 보아 그가 권력 핵심에 포진할 경우 ‘신주류의 역할 축소=구주류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미국에 본사를 둔 A사로부터 박지원이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미국발(發)’ 소문이 나돌자 장성민은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돌아와 당시 당선자 특보를 맡고 있던 최규선(崔圭善·현재 복표사업자 선정 로비관련 구속수감 중)을 시켜 이희호(李姬鎬) 여사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이 얘기가 DJ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신주류의 한 인사는 DJ와 자동차를 함께 타고 가면서 박지원의 ‘친인척 좌익연루설’과 ‘사생활 관련 루머’까지 보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DJ의 박지원에 대한 신임은 생각보다 두터웠다. DJ는 “나도 알고 있어. 본인한테 ‘이런 이야기가 있으니 주의하라’고 얘기해 줘”라고 말했을 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신주류 쪽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박지원은 공보수석 자리를 차지했다. 한 전직 대통령비서관은 “사실 초기에는 김한길 인수위 대변인이 공보수석으로 더 유력했다. 그런데 인수위에서 각종 추측성 기사들이 난무하고 컨트롤이 안 되자 당선자 대변인으로 ‘상황정리’에 긴급 투입된 박지원이 능력을 발휘했고 결국 DJ가 박지원의 손을 들어줬다”고 말했다.

정무수석을 둘러싼 암투도 치열하긴 마찬가지였다. DJ는 청와대 직제 개편 과정에서부터 신주류에 속하는 이강래(李康來)를 정무수석으로 꼽고 있었다. 이강래는 대선 과정에서 김대중 후보의 기획특보로 당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측의 김광일(金光一) 정치특보와 만나 “군과 안기부를 움직이지 않는다” “정치자금을 이회창(李會昌) 후보에게 지원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대선중립 6개항’ 합의를 도출해내는 등 중책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강래의 정무수석 기용에 대해 한화갑(韓和甲) 김옥두(金玉斗) 최재승(崔在昇) 의원 등 동교동계 실세들이 극력 반대했다.

청와대 비서관 인선 발표를 하루 앞둔 2월9일 최재승 의원은 부랴부랴 삼청동 당선자 집무실을 찾아가 DJ를 면담했다. “이강래는 안됩니다. 격도 있고, 당을 잘 아는 사람이 가야합니다. 문희상(文喜相)이 적임자입니다. 김홍일(金弘一) 의원도 그렇고 저희들은 다 같은 생각입니다.”

김옥두 의원도 DJ를 만나 같은 얘기를 했다. DJ는 결국 “그럼 김중권(金重權) 비서실장과 상의하시오”라고 물러섰다. 최 의원은 마침 일요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김중권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화갑이형, 옥두형, 김홍일 의원에게 다 물어봤는데 문희상이 정무수석이 돼야한다고 합니다. 실장님이 확인해보십시오.”

김중권 실장은 발표 당일인 10일 아침 7시반경 한화갑 김옥두 김홍일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 동교동계의 의사를 최종 확인한 뒤 DJ에게 이를 보고했다. 드디어 ‘문희상 OK 사인’이 떨어졌다. 청와대 인선에 구주류의 입김이 관철된 케이스였다.

핵심 권력부처장 인선과정에서는 다른 각도에서 정권실세가 총동원된 물밑 로비전이 벌어졌다. 경쟁상대를 끌어내리기 위한 매터도(흑색선전)도 횡행했다.

‘경제사정총수’라는 국세청장 후보로는 당초 이건춘(李建春) 서울국세청장과 이석희(李碩熙) 국세청 차장이 물망에 올랐다. 국세청 내 호남인맥의 대표였던 안정남(安正男) 직세국장 등이 국민회의의 호남 실세라인을 통해 이건춘을 천거했다. 안정남은 이건춘이 국세청장이 돼야하는 이유를 페이퍼로 정리, 국민회의 실세 L씨에게 전달했다. 페이퍼에는 ‘이석희가 대선 기간 중 기업들로부터 자금을 거둬 이회창 후보에게 전달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후일 세풍(稅風)으로 표면화된 ‘국세청을 통한 대선자금 모금 사건’의 윤곽이 이미 DJ 당선자 시절에 보고됐던 것이다.

L씨는 DJ를 만나 이건춘이 적임자임을 설명하면서 이 페이퍼를 건넸다. 그러자 DJ는 책상 서랍을 열어 “이것 좀 보라”며 다른 페이퍼를 보여줬다. 누군가 이미 같은 내용을 DJ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이종찬은 경기고 후배인 이석희를 밀었는데, ‘이런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국세청의 조직 안정을 위해서는 이석희가 낫다’는 대목을 첨가해 DJ에게 건네준 것 같았다”며 “하여튼 당시 DJ는 이석희와 이건춘을 두고 꽤 오래 고민을 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부분에 대한 이종찬의 설명은 조금 다르다. 그는 “DJ에게 이석희를 천거했는데 당선자가 이석희의 대선자금 모금 행위 등이 담긴 보고서를 나에게 던지면서 ‘이런 내용을 알고 있느냐’고 물어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또 인수위 시절 충청도가 고향인 ROTC 출신 4성 장군 K씨가 역시 ROTC 출신으로 DJ의 차남인 홍업씨에게 건넨 페이퍼가 일부 기자에게 유출된 일도 있다. K씨가 직접 필기한 페이퍼의 내용은 △호남출신이 육군참모총장이 돼서는 안 된다. 군내 소수이기 때문에 군내의 여론에 따르면 비호남 출신이 돼야 한다. △육사출신이 육참총장을 독식하는 데 대한 불만도 고려해야 한다. 군내의 장교 구성비상 이제는 비육사 출신 육참총장의 기용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본인이 육참총장이 돼야한다는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한 것이었으나 결국 K씨는 육참총장에는 기용되지 못했다.

자천자(自薦者)들의 로비도 치열했다. 당시 원내총무였던 박상천(朴相千) 의원은 대선 직후 정부조직법과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처리한 뒤 DJ를 일산 자택으로 찾아가 “정부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결국 희망대로 법무장관에 기용됐다. 반면 DJ의 처조카인 이영작(李榮作) 박사는 DJ에게 “미국을 잘 아는 사람이 주미대사가 돼야한다. 주미대사로 보내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집권 경험이 없이 청와대에 입성한 김대중 정부의 인사는 인력풀의 한계와 정실 개입, 사활을 건 이해집단간의 로비전으로 내부갈등의 단초를 제공했다.

●DJ, 조승형 왜 멀리했나

‘왜 조승형(趙昇衡)을?’

김대중(金大中·DJ) 대통령이 1992년 대선 당시 자신의 비서실장이던 조승형 전 헌법재판관을 끝까지 기용하지 않은 것은 DJ의 인사를 둘러싼 미스터리 중의 하나다.

조 전 재판관은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개각이 있을 때마다 ‘대통령비서실장’ ‘국가정보원장’ ‘감사원장’ 등 하마평에 오르내릴 만큼 과거 야당시절 DJ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와 평소 ‘형님’ ‘아우’하며 지내던 권노갑(權魯甲) 전 최고위원도 인사 때마다 그를 중용하도록 DJ에게 건의했으나 DJ는 외면했다.

그는 DJ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올곧은 처신으로 후배 정치인들에게서도 신망을 얻었다. 그는 사석에서 “DJ는 귀가 얇다”는 비판적 발언을 거침없이 했고 이런 얘기가 DJ에게 여러 채널을 통해 직보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또 96년 15대 총선 당시 김태랑(金太郞) 현 민주당 최고위원과 함께 DJ의 장남인 김홍일(金弘一) 의원의 지역구 출마를 적극 만류했던 당사자. 당시 그는 “아버지가 대통령을 하려는 마당에 아들이 국회의원에 나서서는 안 된다”고 DJ에게 진언했다. 이 때문에 김 의원과는 두고두고 불편한 관계가 이어졌다.

DJ가 조 전 재판관을 멀리한 결정적 이유 중의 하나는 ‘항명사태’. 93년 3월 민주당 전당대회 때 영국에 외유 중이던 DJ는 권 전 최고위원을 통해 당시 이기택(李基澤) 전 공동대표를 대표로 밀도록 지시했으나 조 전 재판관은 “나에게는 아무런 지시가 없었다”며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김상현(金相賢) 의원을 지원했다. 결국 동교동계의 지원을 받은 이 전 공동대표가 승리했지만 이 일로 DJ가 노발대발했음은 물론이다.

DJ는 전당대회 직후 영국으로 자신을 찾아온 조 전 재판관을 밤새 붙들어 놓고 “왜 김상현을 지원했느냐”고 문초하기까지 했다는 후문이다. 동교동계의 한 관계자는 “직언을 서슴지 않는 조 전 재판관을 DJ가 버거워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뜻을 거스른 적이 있는 사람은 끝까지 멀리하는 게 DJ의 스타일”이라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 명단

▽팀 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 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김동원 김두영 신석호 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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