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승련/"폭로할땐 언제고…"

  • 입력 2002년 12월 27일 18시 04분


1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폭로 비방에 이은 무차별 고소 고발’이 단골 메뉴처럼 되풀이됐다.

한나라당은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의 30억원대 재산은닉 의혹과 함께 ‘여성관련 과거 발언을 문제삼으며 공세를 폈다. 또 국가정보원의 불법도청 의혹을 제기하며 녹취록 요약본까지 공개했다. 민주당은 발끈해 폭로에 나섰던 한나라당 당직자를 명예훼손(여성관, 도청의혹) 또는 후보 비방(재산의혹) 혐의로 고소 고발했다.

민주당도 이회창(李會昌) 후보 부인의 10억원 수수 의혹, 3000만명을 상대로 문자메시지 불법선거운동, 선거자금 3000억원 살포 계획 등을 제기했다. 한나라당도 민주당 당직자들을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

두 당이 상대의 폭로와 비방을 문제삼아 검찰에 달려간 것은 모두 20여 차례. 이들은 고소·고발장을 접수하면서 “정치발전을 위해서 진실을 규명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난 지 열흘도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 배기선(裵基善) 기획조정위원장은 27일 의원 간담회에서 “대선 승자로서 선거관련 고소 고발문제는 풀고 가자. 한나라당과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참석한 의원 50여명은 ‘침묵’으로 배 위원장의 제의에 동의했다. 한나라당도 이날 오후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당의 제의를 긍정적으로 검토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선거 때마다 일단 폭로 비방을 해놓고 선거가 끝나면 ‘정치 화합’을 앞세워 어물쩍 넘어가려는 발상은 시대착오이다. 검사들조차 “정치권이 알맹이 없는 고소장을 들고 와 수사해 달라고 했다가, 번번이 고소를 취하하는 바람에 수십년간 ‘폭로→고소→망각’이란 악순환이 계속돼 왔다”고 꼬집고 있다.

정치권의 폭로나 주장에는 흑색선전과 ‘진짜 의혹’이 섞여 있을 수 있다. 국정원의 도청의혹 등 국기와 관련된 의혹은 반드시 밝혀내고 ‘아니면 말고’식 저질 폭로에 대해서는 법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

당장은 시끄럽겠지만 정치권은 이번만큼은 진실을 가려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선거문화가 정착된다. 이번에 또다시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다가는 정치의식이 성숙해진 유권자들에게 다음 선거에서 호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김승련 정치부기자 sr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