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눈]신우철/타협, 성공한 헌법의 조건

  • 입력 2002년 12월 25일 19시 34분


“대통령직선제의 단점은 …국민이 모략에 빠지기 쉽습니다. …국민이 감정적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국민 사이에 당파심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지금부터 50년 전, 이승만 독재의 서곡을 의미했던 ‘발췌개헌’의 와중에서, 대통령직선제 개헌의 문제점을 지적한 김정실 의원의 토론내용이다. 50년이 지난 현재,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박정희 정권 이래 한 세대가 넘도록 계속된 ‘지역 이지메 정치’는 지역주의로써 지역주의를 앙갚음하는 ‘지역 탈리오니즘(복수법)’이란 쌍생아를 출산했다. 언론이 편을 나누어 ‘정치의 시녀 노릇’에 서로 발벗었으며, 법조와 학계도 뒤질세라 ‘정치판 편가르기’에 줄대기 바빴다. 정파와 이념의 대립으로부터 사회의 분열을 막아주는 ‘중성의 접착제’가 모조리 녹아버린 상황에서 국민은 지역갈등 빈부갈등 세대갈등으로 사분오열되었다.

헌법이란 무엇인가. 지금 우리에게 헌법이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 ‘적과 친구의 대립’에서 헌법의 본질을 찾았던 독일 나치의 계관 법학자 카를 슈미트. 하지만 헌법의 역사가 증거하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은 ‘적에 대한 배척’보다는 ‘친구로 묶는 타협’ 쪽에 가깝다. 러시아의 혁명가 일리치 레닌은 헌법이란 ‘프롤레타리아가 점령한 영토’라면서, 혁명 이후 쓸모없는 황금을 모아 변기나 만들자고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헌법의 경제적 본질은 특정 계급의 이익이 관철된 ‘승리의 산물’이라기보다 유사한 경제적 이해관계가 결집된 ‘타협의 산물’로 보는 편이 역사의 진실에 가깝다. 기본권, 국민주권, 민주주의 등 근대헌법의 사고틀조차도 기존 민법 개념, 가톨릭사상, 군주제이론의 ‘타협적 계승’을 통해 형성된 것임에랴.

‘혁명의 정열’만으로는 헌법을 세울 수 없다. 헌법에는 마땅히 ‘타협의 지혜’도 적절히 섞여 들어가야 한다. 요컨대 헌법이란 피로써 씌어진 타협문서다. 현실의 반대세력을 무시 억압하고 정권을 전횡했던 이승만과 박정희. 그 헌정 실패의 이유는 무엇인가. 소수당으로서 4·19혁명에 기대어 정권을 얻은 민주당. 그러나 신·구파의 극한 대립으로 쿠데타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던 1960년 헌법의 교훈은 또 무엇인가. 기존 집권세력과의 ‘불쾌한 타협’에 의해 만들어진 1987년 헌법. 재야로부터 ‘비난의 십자포화’를 두들겨 맞았던 이 헌법이 무려 15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타협의 성공 여부에 헌법의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고 한다면, 성급한 단순화라 하겠는가.

법 제도의 구속에서 일탈해 자의로 유영(遊泳)하던 한국정치가 ‘헌법의 중력권’ 안으로 진입한 것이야말로 현행 헌법이 이룩한 중요한 진전이다. 그러나 지난 15년간 우리 정치는 헌법의 중력에 적응하지 못하고 달 표면을 보행하는 우주인처럼 비틀거렸다. 첫째, 개혁 성향의 단임 대통령이 모든 문제를 완결지으려 욕심을 부리다 정책 실패를 초래한 사례가 많았다. 둘째, 제대로 된 2인자를 적시에 확보하지 못해 레임덕이 가속화되고 정권교체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셋째, 평균 임기 1년 남짓의 잦은 각료 교체로 말미암아 정치권 외부의 전문가를 활용할 수 있다는 대통령제의 장점이 몰각되었다. 넷째, 집권당이 국회 다수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는 사태가 반복되면서 정치세력간의 대립 충돌이 격화되었다.

‘실패한 대통령’의 뒤에는 바로 ‘실패한 타협’이 있다. ‘타협’이야말로 우리의 대통령제 헌법을 제대로 작동시키는 ‘제3의 부품’이다. 이것이 빠지는 순간 헌법이란 기계장치는 그 정상적 작동을 중지한다. 자신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아집을 버려야 헌법은 성공적으로 운용될 수 있다. 어떠한 완벽한 헌법도 관용과 자제, 중용과 조화의 헌정문화가 자리잡지 않고서는 제대로 운용될 리 만무한 것이다. 우리의 헌정은 더 이상 ‘적과 친구를 편가르는 합종연횡술’이어서는 안 된다. 이제 ‘법전 속의 헌법’보다는 ‘마음속의 헌법’을 다듬어가야 할 때다.

신우철 영남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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