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상섭/번지는 反美 추스를 때다

  • 입력 2002년 12월 10일 18시 15분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가장 비상한 관심을 끄는 뉴스는 미군 장갑차에 의한 두 명의 여중생 치사 사건의 여파로 이어지는 반미 분위기의 확산이다. 대통령 선거는 완전히 제쳐놓은 듯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대통령 선거가 없었더라도 과연 요즘과 같은 열기가 가능했을까 하는 의심도 든다. 결국 대통령 선거를 제쳐놓은 열기가 아니라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더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안보 담보한 선거운동 위험▼

이 문제가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동안 반미정서는 운동으로까지 확산돼 어느 누구도 감히 대세를 거스르기 어렵게 번져가고 있다.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까지 미국 비판의 소리를 애써 높이는 것을 보면 누구도 이 추세를 쉽게 거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 싶다. 어지간하면 크지는 않더라도 가다듬은 목소리로 한마디 할 법한 보수언론도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모임에서 오가는 얘기들을 들어보면 현재 계속 상승기류를 타고 있는 반미 분위기를 전적으로 찬성만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이러한 분위기에 비판적 발언을 하면 마치 매국적 행동으로 매도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꽤 확산돼 있다.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한국민들을 무시한 듯한 미군 당국의 무신경하고 조심성 없는 자세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 비판할 것은 당연히 비판해야 하고 고쳐야할 것은 마땅히 고쳐야 한다. 그러나 최근 일부이기는 하나 이러한 비판에 머물지 않고 한국의 안보상황 자체에 대한 무책임한 재평가와 미군철수론으로까지 이어짐으로써 반미 분위기의 확산이 순수한 시민운동을 넘어 정치운동과 연계된다는 느낌마저 준다.

김대중 대통령도 지적했듯이 확산일로의 반미운동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북한식 통일전선 전략에 동의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주한미군의 역할과 필요성에는 아무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생각 있는 많은 사람들이 최근의 분위기를 크게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앞에 나서서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잘못 말했다가 어떤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어떻게 되었든 반미운동이 조속히 차단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큰 소리를 내지 못해서 그렇지, 훨씬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빨리 차단되지 않는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정치, 즉 대통령 선거와 관련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모든 후보자들이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여론의 눈치를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선거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와 민족의 안위를 볼모로 잡는 일은 두고두고 내려질 역사의 준엄한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무언의 유권자들이 표로써 내릴 준엄한 심판은 무섭지 않은가. 민족의 삶이라는 근본적인 일과 관련해 비판과 심판을 피하고자 한다면 후보들은 최소한 안보 문제가 선거쟁점이 될 수 없다는 점에 대해 공동선언을 해야 할 것이다.

▼정부, 적극대응 나서야▼

다음으로는 정부의 보다 확고한 입장 표명이 필요하다. 어쩌면 정부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이 무책임하게도 느껴진다. 정책집행 실무자보다는 정책방향의 결정권을 쥔 정치인들이 지목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대북정책과 관련해 현 정부와 미국 사이의 마찰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현 정부로서는 미국에 대해 섭섭한 감정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반미 분위기 확산에 대해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차단하지 않는다면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다. 한미간의 마찰이 수반할 수도 있는 엄청난 정치적 결과가 국민 전체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지난 반세기 동안 왜곡되었던 정치 속에서 미국 비판은 금기사항의 하나였다. 이제 그 금기가 깨지면서 생긴 반작용이 반미 운동의 정서적 기반이 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분명 우리 국민의 성장을 위한 도약대가 될 수 있지만, 자칫 국가안위 문제와 관련해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도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박상섭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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