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호기/´권영길 효과´가 궁금하다

  • 입력 2002년 12월 5일 17시 58분


신선한 충격이었다. 대선후보 첫 TV 합동토론회의 민주노동당(민노당) 권영길 후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야당과 여당을 ‘부패 원조당’과 ‘부패 신장개업당’으로 비판하거나 ‘여중생 치사사건’에 대해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직접 사과를 촉구하는 후보 공동서명을 제안하는 등 권 후보의 발언이 적잖은 화제를 모으고 있다. 민노당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반 새로울 게 없지만, 상당수 국민에게는 시대의 변화를 절감케 하는 토론회였다.

▼전국에 생중계된 ´진보주의´▼

일부 언론에서 보도하듯 이번 토론회의 가장 큰 수혜자라 할 수 있는 권 후보의 이념은 진보주의다. 서구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의 구도를 보혁(保革) 구도로 보는 것은 사실 온당치 못하며, 오히려 세 후보의 이념적 구도를 ‘보수 대 중도 대 진보’로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다만 우리 정치 지형의 특성상 권 후보로 대표되는 진보 세력이 크게 부각되지 못해 왔던 게 현실이다.

권 후보의 부상은 지난 지방선거의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다. 소수 정당의 후보라서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지 잠재력은 이미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사회처럼 기성 정당들의 대의(代議) 기능이 제대로 활성화돼 있지 않은 경우, 시민사회의 바람을 탈 수 있다면 신생 정당이라 하더라도 단기간 안에 상당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이 점에서 과연 민노당이 독일 녹색당이나 브라질 노동자당처럼 기존 정당구도를 어느 정도 변화시킬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동시에 권 후보의 부상은 시대의 변화를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1990년대 이후 세계사적 흐름을 주도해 온 것은 다소 굴곡이 있다 하더라도 탈냉전과 세계화이며, 이는 오늘날 정치적 이념 구도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더욱이 지난 15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열린 민주화의 공간은 정치적 선택의 다양성을 증대시켜 왔다. 이런 상황 아래서 지체된 정치민주화는 정치적 무관심을 확산해 왔으며, 이는 그만큼 신생 정당의 활동 공간을 넓혀왔다. 탈냉전 시대의 보수·중도·진보의 공존이 21세기 정치사회의 새로운 구도라면, 권 후보의 부상은 바로 이 물결을 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단기적으로 이른바 ‘권 후보 효과’는 이번 대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에는 미세한 계산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2000년 미국 대선의 경우처럼 노 후보와 이 후보가 박빙 승부로 갈 경우 권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선거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반대로 권 후보의 부상은 개혁 세력에 대한 지지의 외연을 확장시킬 가능성도 있다. 현재로서는 ‘권 후보 효과’가 미국 대선에서 앨 고어 후보의 표를 잠식함으로써 부시 후보가 당선되는 데 결과적으로 기여한 소비자운동가 랠프 네이더의 경우처럼 나타날 것인지는 미지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번 대선에서 권 후보의 실제 득표율이 그리 높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권 후보 정책에는 공감하나 그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갖는 유권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권 후보와 민노당에 소득이 전혀 없는 게 아니다. 토론회를 통해 민노당은 자신의 존재를 선명히 각인시켰으며, 이는 다가오는 2004년 총선에서 귀중한 재산이 될 것이다. 이 점에서 권 후보의 부상은 보수 양당체제를 이뤄 온 우리 정치사회의 결빙구조를 해빙시킬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이룰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념정당 구도재편 계기될까▼

우리 사회에서 건강한 이념정당의 구도 형성을 가로막아 온 것은 지역주의 정치다. 이 지역주의 정치를 넘어서는 것은 시민사회 내 이념, 계층, 성별, 세대 등 다양한 변수가 활성화될 때 가능하다. 이 점에서 권 후보의 부상은 앞으로 정치사회의 변화를 암시하는 하나의 중요한 징표일지도 모른다. 이번 대선에서 권 후보가 과연 어느 정도의 지지를 받을 것인지 새삼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정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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