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이성락/환자 저버리는 약 참조가격제

  • 입력 2002년 11월 17일 18시 56분


건강보험 재정상황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미 언론 매체를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보건복지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여러 가지 보험재정 안정화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중 몇 가지는 보험 약가와 관련이 있다. 약제 비급여 확대, 약품의 최저 실거래가제, 약값 참조가격제 등이 그런 예들이다. 이러한 약가 관련 대책은 의료계 종사자들에게조차 혼란스러울 정도다. 일반인에게는 그저 ‘약값이 내려가겠지’ 하는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이 가운데 약값 참조가격제는 심히 우려되는 사안이다. 참조가격제란 의사가 약을 처방할 때 그 가격이 정부가 제시한 일정 가격 이상이면 그 차액을 환자가 부담하는 제도다.

의사가 환자를 위해 최선의 약을 처방한다는 것은 그 가격의 고하를 막론하고 의사의 의무이며 환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다. 그러나 참조가격제를 시행하면 좋은 약을 써야 하는 경우에도 값이 싼 속칭 ‘카피제품’을 처방하는 쪽으로 유도되는 결과를 낳는다. 정부는 이 제도의 도입으로 연간 약 1300억원의 보험료 절감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 정책을 보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고가의 약을 복용하고 싶으면 돈을 더 내고 사먹으라’는 말이 된다. 일견 시장논리가 적용되는 듯하나 실은 의료의 기본적인 책무를 저버리도록 하는 반사회적 발상이다. 돈 있는 사람은 비싸고 좋은 약을 쓸 수 있겠으나 저소득층 의료소비자는 비싸긴 하나 좋은 약을 쓰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에 대해 의료계는 물론 시민단체들도 찬반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건강보험 재정의 만성적 적자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지만, 의료계는 의사의 진료권이 침해된다 하여, 제약업계는 양질의 의약품이 퇴출된다 하여, 시민단체들은 환자의 부담만을 늘린다 하여 각기 정부의 시행안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어느 일간지의 의료현장 보도에서는 심지어 ‘우리 약 써달라·외제차 뇌물’이란 표제 하에 의사가 고가약을 처방하는 것이 속칭 리베이트 때문인 양 오도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의사의 약 처방에 대해 단 한 줄 기사로 매도하는 현실에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값싼 약품의 질과 효능이 값비싼 약과 비교해 동등하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약품의 질이 최고 수준이라는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의료소비자인 국민이 싼값의 약만을 쓰도록 제도적으로 권장한다면 많은 문제점이 야기될 것이다.

약품 가격에 있어서 고가와 저가의 약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질병의 치료에서는 오직 적정한 약만이 있을 뿐이다. 환자에게 적합한 약은 값이 어떻든 간에 처방되어야 한다. 적정한 약을 경제 사정으로 투약하지 못하는 환자를 위해 국가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값이 싼 약에는 ‘함량 및 품질이 약간 모자라는 약’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환자에게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양질의 약이 주는 혜택을 주지 않을 수 있는가.

이성락 아주대 의대 피부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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