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야망과 성공

  • 입력 2002년 11월 13일 17시 59분


‘난득호도(難得糊塗).’ 중국인의 집에 가면 이런 글귀를 붙여놓은 걸 흔히 본다. 청나라 때의 문인 정판교가 처음 쓴 말로, 바보인 척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유능해도 성공하기 어려운 판에 바보인 척하다니? 그러나 이 ‘바보 처세술’은 적잖은 중국인들이 채택하고 있는 삶의 철학이다. 생존을 위한 위장술이자 더욱 강한 일격을 날리기 위해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솔직함은 하수(下手)의 미덕일 뿐, 자신의 패를 있는 대로 보여주는 건 고수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손자는 ‘상대의 의도를 드러나게 하고 나의 의도는 안보이게 해야(形人而我無形)’ 이길 수 있다고 했다.

▷영국 BBC방송이 소개한 ‘중국 지도자 성공 8계명’ 역시 일견 바보 처세술 같다. 해당 행위를 하지 말라는 첫 번째 계명 바로 다음이 ‘따분해야 한다(Be boring)’는 거다. 승진기회가 와도 무슨 계획이나 야망이 있는 것처럼 말하면 큰일난다. 상관이 위협을 느껴 제거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의뭉한 중국인답다며 웃어 넘길 수도 있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 기업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보인다. 최근 삼성전자가 상사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부하의 성향을 물었더니 부지런한 직원이 일등이요, 리더십있는 직원은 꼴찌로 나타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리더십은 리더에게나 소용되는 덕목인 까닭이다. 정작 부하 직원에게 필요한 것은 시키는 일을 부지런하고 순발력있게 해내는 폴로십(followship)이라고 삼성측은 설명한다. 물론 중국 공산당의 예비 지도자들이 내비치는 야망과 우리 기업의 평사원들이 보이는 리더십을 같은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데서나 지배욕을 드러내선 안 된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이다. 지금 중국 제4세대 지도자로 우뚝 선 후진타오를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의 성공 비결을 마키아벨리식으로 해석하면, 자기가 살고 있는 때와 그 속에서 일할 수 있는 흐름을 알아내서 거기에 자신을 정확히 맞춘 덕분이었다.

▷중국인들이 바보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기실 그런 척할 뿐이라는 사실은 섬뜩하다. 중국인과 거래하는 한국인들이 얼마나 많이 이에 속았을지 모를 일이다. 요즘 붐을 이루고 있는 리더십 관련 책들은 리더십이야말로 직장인 성공의 필수요건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섣불리 리더인 척하다가는 상사의 노여움을 살 수도 있으니 책만 믿어서도 안 될 노릇이다. 세상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다르다. 보이는 대로 믿으며 살 것인지, 끊임없이 의심하며 살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린 일일까.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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