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시간의 지배 저항 ´시계 밖의 시간´

  • 입력 2002년 11월 8일 17시 44분


◇시계 밖의 시간/제이 그리피스 지음 박은주 옮김/591쪽 2만3000원 당대

1912년, 영국 그리니치를 표준자오선으로 삼는 데 끝까지 반대하던 프랑스가 고집을 꺾자 지구는 각 지역의 문화에 따른 시간과 관계없이 24시간으로 구성된 세계 공통의 시간을 갖게 됐다. 그 해 4월14일 자정, 침몰하던 ‘타이태닉호’에서 날아온 조난소식은 전세계에 동시에 타전되며 전 세계가 하나의 시간권에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당시 최첨단 과학기술의 결집체이자 인간이 만든 가장 거대한 물체였던 이 배가 침몰한 주요 원인은 바로 ‘운행시간표’에 대한 집착이었다. ‘여객선은 예정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안전을 무시하고 무리한 운행을 강행했던 것이다. 세계를 단일한 단위로 묶은 시간의 ‘폭력성’은 이미 그 초창기부터 위력을 과시한 셈이다.

저자는 아직도 이 세계공통의 시간이 지배하지 못하는 ‘덜 시간화’된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 그들의 ‘시간’을 체험하며, 서구의 근대가 만든 시간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왜곡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뉴턴’. 바다 한가운데서 뉴턴이 바다와 시간을 재단하고 있다./사진제공 당대

우리가 1월 2월 3월 등으로 부르는 열두 개의 달은 시베리아 북부지방의 우고르 오스탸크 족에게는 ‘산란의 달’ ‘까마귀의 달’ ‘백목질 소나무의 달’ ‘연어잡이의 달’이고, 미시시피강 저지대 계곡의 나체족에는 ‘사슴의 달’ ‘딸기의 달’ ‘작은 옥수수의 달’이다.

우리의 시간은 우리의 행위와 분리된 추상의 단위지만 그들의 시간은 행위와 구분이 되지 않는 삶의 일부다. 그들의 삶에서는 미리 규정된 ‘시간’의 범주가 ‘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날 때’가 바로 ‘그 시간’인 것이다. 저자는 생동감 넘치는 이 ‘야성의 흐름’이 우리에게서 근대적 시간이라는 ‘죽음의 벽’으로 대치됐음을 안타까워한다.

월경과 출산으로 상징되는 여성의 ‘야성의 시간’은 가부장제 사회의 편견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남성중심적 시간의 기준으로 통제되고, 생기발랄한 아이들의 ‘야성의 시간’은 학교의 표준적이고 일률적인 규칙으로 틀지어진다.

20세기 초 서구인들이 세계를 표준시간으로 묶은 것은 다수의 삶과 노동을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동일한 기준으로 통제하는 이 ‘시간’은 다수의 동시 노동을 필수조건으로 하는 ‘산업화’의 밑거름이 됐고, 이제 전 세계를 서구 중심의 단일 시장으로 묶는 세계화의 원동력이 됐다.

사람들은 시간의 지배가 바로 인간을 지배하는 첩경임을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왕조가 바뀌면 새로이 역법(曆法)이 만들어졌고, 그 역법의 제정은 오직 천자(天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서구 근대의 역법이 전 세계에 통용된다는 것은 서양이 이 시대의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분명히 증명해 주는 증거다.

이제 지구상의 유일신이 된 서구의 시간은 날(日)에서 시간으로, 시간에서 분으로, 분에서 초로 세분화되며 인간의 생활을 점점 더 철저히 지배한다. 한국인들도 산업화와 함께 이 시간의 지배에 익숙해진 듯했지만, 1997년 말부터 외환위기를 극복한다며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른 ‘시간’을 강요받게 되자 이 ‘시간’은 다시 새로운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시(時)테크’를 들먹이며 시간을 더 철저히 쪼개는 방법을 강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으로부터의 일탈을 갈망하며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동문선),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자인) 같은 책들을 베스트셀러에 올려놨다.

때로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시간’ 그 자체가 신비로운 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시간박물관’(푸른숲), ‘시간은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는가’(황금가지), ‘시간의 발견’(휴머니스트), ‘시간’(석필), ‘시간의 철학적 성찰’(문예출판사) 등은 바로 지배자인 ‘시간’ 앞에 바쳐진 경배(敬拜)의 제물이었다.

그리피스의 책은 풍성한 어휘와 다채로운 비유가 넘쳐흐르는 문체로 자신이 체험한 ‘야성의 시간’을 독자에게 전이시켜 주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점점 더 강해져만 가는 ‘시간의 신’에 대한 또 한 번의 힘겨운 저항일 뿐이다.

김형찬기자 철학박사·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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