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病주는 배우자

  • 입력 2002년 11월 5일 18시 28분


10여년 전, 여자도 당당하게 혼자 살 수 있다는 걸 입증하고 싶었던 우리나라의 한 사회단체가 기혼여성과 비혼(非婚)여성의 삶과 의식을 비교한 일이 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기혼여성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더 건강하다고 나타난 것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옆에서 챙겨주는 반려자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살고, 뇌중풍이나 사고로 죽을 가능성도 적다는 건 이제 백만인의 건강상식으로 통한다. 미국 시카고대학의 린다 와이트 박사는 ‘결혼을 위한 경우’라는 책에서 “결혼은 적절한 식사 운동 금연처럼 삶의 안전벨트 역할을 한다”고 쓰기도 했다.

▷그런데 배우자의 극진한 보살핌이 오히려 만성통증 환자의 증세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최근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 연구팀이 알아냈다니, 갑자기 현기증이 난다. 등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환자 옆에서 배우자가 입안의 혀처럼 시중을 들어주면 아예 곁에 없을 때보다 통증을 더 느낀다는 거다. 환자의 뇌를 정밀하게 측정해서 나온 결과이므로 단순한 엄살이라고 묵살하기도 어렵다. 만수받이해주는 배우자가 그 방에 있다는 것 자체가 통증을 증가시키고 앓는 소리도 더 나오게 만든다는 게 심리학 교수 헤르타 플로르의 설명이다.

▷이쯤 되면 어떤 사람이 이상적인 배우자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혼자 있을 때는 태연하게 바퀴벌레를 잡던 용감한 새댁도 남편이 옆에 있으면 파리만 날아와도 심약한 척 놀라는 일이 곧잘 있다. ‘바지런한 아내가 남편을 느림보로 만든다’는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한쪽이 든든하게 기댈 만하면 반대쪽은 넘치거나 처지는 게 세상 이치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가 지금까지도 악처의 대명사로 악명을 떨치고 있으나 크산티페 덕택에 소크라테스가 위대한 철학자가 됐다는 건 그 자신도 인정한 바다. 삶의 신산고통없이 철학이 나오기는 어려운 일이므로.

▷과학은 거짓말을 안 할 것 같지만 사실 학자들의 연구결과 만큼 자유롭게 해석 적용되는 것도 흔치 않다. 이번 발표 역시 폄하할 일은 아니되, 좋은 배우자가 건강에 이롭고 못된 배우자는 건강에 해롭다는 자료도 적지 않다. 심지어 건강수칙에 집착하면 되레 건강을 해친다는 조사결과도 나와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결국,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지금 고약한 배우자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차라리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행복은 놓쳤는지 몰라도 그 덕에 철학자로 성숙하고 있다고. 문제는 그 마음을 고쳐 먹는 일이 과학적 연구결과를 내놓는 것 이상으로 어렵다는 것이지만.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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