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一. 四海는 하나가…(26)

  • 입력 2002년 10월 24일 17시 59분


짧은 제국의 황혼 ⑤

“위와 아래가 한마음이면 오래 권세를 지켜나갈 수가 있고, 안과 밖이 뜻을 같이하면 어긋나 그릇됨이 없습니다. 승상께서 저의 말을 따라주신다면 오래도록 봉후(封侯)를 유지하며 대를 이어 고(孤·왕이 스스로를 이르는 말)를 칭하는 가문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왕자교(王子喬·적송자와 마찬가지로 전설 속의 선인)나 적송자(赤松子)처럼 오래 사실 수 있을 것이고, 공자(孔子)나 묵자(墨子)처럼 지혜로운 사람으로 길이 추앙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저와 공자 호해를 따르지 않으신다면 재앙이 자손에까지 미칠 것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듣기로 참으로 처신이 능한 사람은 재앙을 복으로 돌릴 줄 안다 하였습니다. 승상께서는 이제 어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이익으로 꾀고 해악으로 위협하니 어지간한 이사도 더는 버텨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한 가닥 남은 충정이 있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잊지 않았다.

“아아!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홀로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구나. 도대체 어디에 이 한 목숨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냐!”

그리고 눈물까지 흘리면서 한숨을 내쉬다가 마침내 조고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조고는 그 길로 돌아가 호해에게 알렸다.

“현명하신 태자마마의 명을 받들고 그것을 승상에게 전하였더니, 승상께서도 감히 그 명을 어기지 못하셨습니다.”

호해를 한껏 추켜 올려 기세를 북돋아 주면서도 은근히 자신의 공을 상기시키는 교묘한 말재주였다.

  <이문열 신작장편소설>
  호모엑세쿠탄스! 인터넷으로 연재하는 이문열 문학의 결정판! 지금 읽어보세요.

그리하여 조고와 호해, 이사 세 사람에 의해 역사상 유례가 드문 큰 바꿔치기가 꾸며지고 이루어졌다. 없는 시황제의 조서를 뒤늦게 만들어 내 호해를 먼저 태자로 세우고, 맏아들 부소에게 미리 내린 조서는 새로 쓰여졌다.

<짐은 천하를 순시하며 명산(명산)의 여러 신들에게 기도 드리고 제사를 올려 천수(천수)를 늘여보려 한다. 늘 궁궐을 비워두고 사방으로 떠도는 터라 도성에 남은 대신과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에게 의지하는 바 크다. 그런데 너 부소는 장군 몽염과 함께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변경에 머문 지가 벌써 여러 해가 되었으나 한 걸음도 더 나아감이 없었고, 많은 군사와 물자를 써 없앴으나 한치의 공도 세우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도리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어 짐이 하는 일을 비방하였으며, 그곳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태자의 자리로 돌아올 수 없음을 밤낮으로 원망하였다. 이는 신하로서 충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식으로서도 효성스럽지 못한 짓이라, 이제 너 부소에게 칼을 내리니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죄하라.

또 장군 몽염은 부소와 더불어 도성밖에 머물면서 그 불충과 불효를 바로잡지 못하고 함께 세월만 허비했으니 그 지모를 알겠노라. 이는 또한 신하된 자로서 충성스럽지 못함이라 죽음을 명하노니, 군대는 부장(부장)인 왕리(왕리)에게 맡기고 어서 명을 따르도록 하라>

조고와 이사는 그렇게 고쳐 쓴 편지에 옥새를 눌러 봉하고, 호해에게 빌붙어 지내는 빈객(賓客)을 사자로 삼아 상군(上郡)으로 보냈다.

황제로부터 사자가 왔다는 말을 듣자 부소와 몽염은 놀라 뛰어나가 맞아들였다. 그러나 조서를 받아 읽어보니 마른날에 날벼락 같은 내용이었다. 함께 내려진 칼을 받은 부소는 울며 내실로 들어가 자결하려 하였다. 몽염이 그런 부소를 말렸다.

“폐하께서는 지금 도성을 나와 계시고 아직 태자를 책봉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30만 대군으로 변방을 지키게 하시고 또 공자를 보내 저와 군사들을 감독케 하셨으니, 저희가 맡은 일의 여간 막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 사람의 사신이 왔다고 해서 가볍게 자결해버리신다면, 그가 가져온 조서가 거짓인지 참인지는 어떻게 알아보시겠습니까? 한번 더 용서를 간청해 보시고 그래도 죽음이 처분이 내려온다면 그때 자살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부소가 머뭇거리자 사자가 다시 시황제의 명을 내세워 매섭게 자결을 재촉했다. 어질고 소심한 부소는 그 재촉을 견뎌낼 수 없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죽음을 내리셨는데, 어찌 구차하게 용서를 빌 수 있겠소?”

몽염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하지만 몽염은 그래도 뻗대었다. 사자는 서두르다 일을 그르칠까 두려워 함부로 몽염을 죽이지 못했다. 그를 옥리(獄吏)에게 넘겨 가까운 양주현(陽周縣)에 가두어 두게 했다.

한편 거짓된 조서와 사자를 부소와 몽염에게 보내놓고 마음 졸이며 결과를 기다리는 조고와 이사에게는 새로운 골치거리가 생겼다. 아무리 시황제의 죽음을 감추어도 7월 더위라 시체 썩는 냄새는 어쩔 수가 없었다. 조고가 다시 기막힌 꾀를 냈다.

“여럿이 보는 데서 소금에 절여 말린 생선을 한 섬(石) 사다 수레에 실은 뒤에 온량거를 따르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같은 조고의 말대로 해보니, 생선 자반 냄새와 시체 썩는 냄새가 뒤섞여 그 뒤로는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다시 사자가 돌아와 부소는 자결하고 몽염은 가두어두었음을 알렸다. 호해와 조고, 이사는 그 소식에 기뻐하며 일찍이 몽염이 뚫은 직도(直道)를 골라 함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했다.

시황제의 죽음이 천하에 선포된 것은 순수 행렬이 아무 탈없이 함양으로 돌아온 뒤였다. 조고와 이사는 발상(發喪)과 함께 거짓 조서를 앞세워 호해를 태자로 세웠다. 그리고 천하는 하루도 주인 없이 비워둘 수 없다 하여 호해로 하여금 황제 자리를 잇게 했다. 바로 이세(二世) 황제로, 그때 그의 나이 스물 한 살이었다.

이세 황제는 시황제의 장례를 첫 번째 일로 삼았다. 그 해 9월 시황제를 여산(驪山)에 안장(安葬)했는데, 허영에 찬 절대권력과 정당성도 정통성도 없는 그 계승자가 보여줄 수 있는 나쁜 본보기는 거기서 모두 보여주었다.

부패한 절대권력이 가장 흔하게 부리는 허영은 시간과 공간을 향한 것이다. 시황제가 순수(巡狩)때마다 이름난 산천에 비석을 세우고 반반한 바위를 보면 글자를 새겨 되잖은 제 업적을 길이 전하려고 한 것은 시간을 향한 허영이요, 만리장성이다 아방궁이다 하여 세상에서 가장 크거나 높거나 긴 것을 세우기를 좋아한 것은 공간을 향해 부린 허영이었다. 그런데 그런 허영의 절정(絶頂)이 바로 젊어서부터 여산에다 조성하기 시작한 자신의 능묘(陵墓)였다.

천하를 통일한 뒤 시황제는 전국에서 끌려온 죄수 70여만 명을 그 일에 투입시켜 완공을 서둘렀다. 먼저 사방 십리의 땅을 깊이 파 큰돌로 벽을 쌓고 위를 덮은 뒤, 녹은 구리 물을 부어 틈새를 메웠다. 세상에서 가장 큰 현실(玄室) 외곽(外槨)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자신의 궁궐뿐만 아니라 망해버린 육국(六國)의 궁궐까지 큼지막한 모형으로 앉히고, 백관(百官)과 노비, 생전에 썼던 보배로운 물품과 값진 장식도 모형이나 진품으로 가득 채웠다. 현실 외곽 천장에는 천문(天文)을 도형으로 삼아 별자리와 은하를 펼치고, 바닥에는 지리(地理)를 본떠 세상의 모습을 베풀었다. 수은으로 그 백천(百川)과 강하(江河)와 대해(大海)를 채우고, 기계를 작동시켜 서로 이어 흐르도록 했으며, 인어(人魚)의 기름으로 양초를 만들어 오랫동안 무덤 안을 밝힐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공장(工匠)들에게 명하여 혹 무덤을 몰래 파들어 오는 자가 있으면 절로 화살을 쏘아 부치는 활과 쇠뇌를 만들게 해 여기저기 걸어두었다.

타락한 절대권력의 허영처럼, 정통성과 정당성이 결여된 그 승계자가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쓰는 수법도 유형화(類型化)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흔한 것은 상징과 조작으로 앞선 절대권력의 권위를 극대화하는 것인데, 이세 황제가 바로 그랬다. 시황제의 허영을 효도란 이름으로 이어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자신이 의지할 권위를 극대화하려 하였다.

이세 황제는 시황제를 신비화, 절대화하여 그 권위를 키우기에 앞서, 효도를 핑계한 공포정치로 백성들을 먼저 위압했다.

“선제(先帝)의 후궁들 가운데 자식이 없는 이들까지 궁궐 밖으로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그들을 능묘 안으로 보내어 죽은 뒤에까지 선제를 모실 수 있게 하라.”

옛 진나라에 있었던 순장(殉葬)의 관습을 되살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해 수백 명의 후궁들이 모두 산채로 시황제와 함께 무덤에 들게되니, 그 참혹한 소문은 그대로 공포가 되어 사람들을 짓눌렀다. 그런데도 이세황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무덤 안을 지키는 기관을 만든 장인(匠人)들과 그걸 설치한 일꾼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이 모두 어디에 무엇이

설치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으니, 만약 그게 누설된다면 아무리 정교하고 은밀한 장치라도 무덤을 지키는데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또 진기한 보물들을 옮긴 일꾼들과 값나가는 물품들이 놓인 곳을 아는 자들이 많으니 그 또한 누설되면 무덤 안이 온전히 보전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아첨꾼이 와서 그렇게 말하자, 이세황제는 다시 아비의 무덤을 지킨다는 구실아래 함부로 사람을 죽일 길을 찾아냈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설치될 기관이 다 설치되고, 들여놓을 보물들이 다 들여놓아지자, 이세황제는 명을 내려 무덤 안 길[墓道] 가운데 문[中門]을 닫게 했다. 그리고 장인들과 일꾼들을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고 다시 바깥문[外槨門]을 굳게 닫아거니 그 안에서 죽은 사람이 또 수천 명이었다. 그 일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모두 몸서리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황제의 권력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세황제가 죽은 시황제를 절대화하고 신비감을 주는데 공포만을 쓴 것은 아니었다. 의례와 제도를 통해 시황제의 권위를 극대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돌로 된 엄청난 무덤 외곽(外槨)위에 두텁게 흙을 덮고 풀과 나무를 심어 산 같이 만든 뒤, 이세 황제는 다시 백관을 불러놓고 말했다.

“선제의 침묘(寢廟)에 바칠 희생과 산천을 비롯해 선제를 위해 드리는 모든 제사에 쓰는 예물을 늘리고 규모를 키우도록 하라. 또 의례와 제도로서 위대하고 거룩하신 선제를 높이고 우러를 방도를 궁리해 보라.”

그러자 대신들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여 시황제의 사당[廟]을 일곱 개나 세워 나라에서 가장 높이 받드는 조묘(祖廟)로 삼았다. 그리고 전국각지에서 헌상한 공물로 제사하게 하였는데 더할래야 더 더할 것이 없을 만큼 희생을 늘리고 공경하는 예를 두루 갖추었다. 특히 서옹(西雍)과 함양에 있는 사당의 제사에서는 황제가 친히 예법에 따라 잔을 올리게 하니 시황제의 권위는 죽어서 더욱 눈부시었다.

이문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