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도정일/´대학원 미달´ 놀랄 일인가

  • 입력 2002년 10월 22일 18시 27분


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 전기 모집에서 인문, 자연계열 기초학문 분야와 농생물학 분야 학과들에서 미달 사태가 벌어졌다는 소식이다. 국내 최고라는 서울대 대학원의 사정이 이러하다면 다른 지방 대학이나 사립대학 대학원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이런 미달 사태가 의미하는 것은 간단히 두 가지다. 하나는 국내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이른바 국내파 학문 후속세대가 해마다 감소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 학문 토대의 현실적 붕괴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대학-정부-사회 ´무대책 경쟁´▼

이런 사태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예상되어온 것이어서 새삼 충격을 줄 뉴스는 아니다. 충격이 있다면 대학원 지망자 감소와 학문의 국내 토대 붕괴를 충분히 예견하면서도 정부, 사회, 대학이 지금까지 아무 조치도 취한 바 없다는 사실, 말하자면 내외에 자랑할 만한 ‘무감각의 능력’ 그 자체이다. 이 무감각의 능력을 잘 발휘하고 있는 것은 대학, 정부, 사회의 3자이다. 우선 대학들은 국내파 학위 소지자를 채용해주지는 않으면서 해마다 학생은 모집해서 대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것은 무감각을 넘어 ‘위선’의 차원이다. 졸업해봐야 갈 곳 없는 사람들을 길러내기 위해 대학원을 운영한다? 이유는? 대학에 대학원이 있어야 한다는 알량한 이유, 대학원 운영으로 학교 경영수지나 맞추자는 계산, 교수들이 대학원 과정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런 이유의 어느 것도 학문의 국내 토대를 위한 배려는 담고 있지 않다.

필자는 국내 대학원이 모두 망해서 단 한 사람의 지망자도 없는 사태로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머잖아 그런 날이 올 수도 있다. 생각해 보라. 국내 대학원에서 학문 후계세대가 되겠다고 나서는 것이 폐인(廢人)되는 확실한 길일 때, 그리고 청춘을 바쳐 공부한다는 것이 이 대학 저 대학 뛰어다니는 고달픈 시간강사 되기의 확실한 초대장(招待狀)일 때, 어떤 바보가 대학원엘 가겠다고 나설 것인가? 내가 보기에 국내 대학원은 소수의 국학 부문을 빼고는 모두 문 닫는 것이 옳다. 그나마 아직 진학자들이 있어 대학원이 연명하고 있는 것은 우리 젊은이들이 그만큼 순수하기 때문이거나 학문 열정이 높아서다.

정부는 입으로는 기초학문 육성을 말하면서도 기초학문이 발전하기는커녕 살아남기조차 어려운 연구-취업환경과 사회적 조건들을 만들어 온 장본인이다. 지금 전국의 대학에서의 정신상태는 “이거 해서 돈 되냐?”라는 단 하나의 질문에 지배되고 있다. 이 질문의 진원지는 단연 우리 정부다. 금방 회수될 가시적 성과, 응용기술, 직업인 양성에만 고등교육의 목표가 있다는 듯이 정책을 만들고 대학을 압박하고 교육 목표를 왜곡시켜, 안 그래도 제 정신 못 차리는 우리 대학을 시장바닥으로 만들어 온 것이 우리 정부이기 때문이다. 고위 정책 관리들 중에는 “국내 대학원이 꼭 필요한가, 공부할 사람은 유학 가면 되지”라며 이것도 ‘세계화시대의 현실’이라 주장해 온 사람들이 없지 않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학문의 ‘국내 토대’란 어불성설이고 필요하지도 않다. 이런 나라에서 대학원이 망하지 않고 잘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활용못할 인재 뭐하러 뽑나▼

입으로는 ‘기본이 있는 나라’와 ‘기초가 선 사회’를 열심히 말하면서도 사실은 기초가 뭐고 기본이 뭔지 모르는 것이 우리 사회다.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더러 아는 듯한 순간이 있다 해도 그런 순간이 우리의 사회적 정책결정, 행동, 가치, 태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므로 모르는 것이나 진배없다. 한탕주의, 빠른 성공, 모방, 집단 추수주의, 유행병 같은 질병들이 하도 강해서 진득하게 기초를 다지고 기본을 놓고 길게 미래를 준비하는 능력은 발휘될 길이 막막하다. 이웃 일본이 금년에 기초과학 부문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두 명이나 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할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기초학문이 뿌리내리고 자랄 수 있으랴.

나는 국내 대학원이 어서 문 닫고 폐업하는 것이 그나마 위선과 자기 모순을 줄이는 길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학문 후계세대에는 참 미안한 얘기지만.

도정일 경희대 교수·영문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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