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착하게 살아도 될까

  • 동아일보
  • 입력 2002년 9월 30일 18시 05분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을 배운 것은 중학교 1학년 도덕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성선설을 믿는지, 성악설을 믿는지 손들어보라고 했다. 나는 성선설에 손을 들었다. 성악설을 믿는다고 하면 내 본성도 악하다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의 본성이 착한 것인지 정말 혼란스럽다. 하루도 빠짐없이 신문에 등장하는 쉽지도 않은 영어 ‘모럴 해저드’나 ‘도덕적 해이’라는 단어를 보면 숨이 막힌다.
▼삶의 표준이 된 도덕적 해이▼
외환위기 이후 부실금융과 기업의 구조조정을 하라고 지원된 공적자금 156조원은 돈을 준 쪽부터 받은 쪽뿐 아니라 잘 썼는지 못 썼는지를 감독한 쪽까지 사이좋게 도덕적 해이를 저지른 모양이다. 기업은 회계부정으로 투자자를 속이면서도 내부정보로 생긴 이익을 감쪽같이 챙겨먹고, 증권사는 거짓정보로 주가조작을 한다. 몇몇 공기업의 흥청망청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정부마저 한통속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판이다.
총리 청문회가 시작되면 우리는 또 세금 탈루, 변칙 상속 같은 귀 익은 단어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예방주사를 맞아 면역이 된지라 이번엔 ‘돈 있고 권세 있으면 다 그렇게 사는 거지’ 하며 그냥 넘어갈 가능성이 많다.
이런 도덕적 해이의 시리즈 속에서 관련자들을 비난하는 건 쉽다. 그러나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겁이 더럭 난다. 나랏돈이든 기업돈이든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이고 남들이 눈먼 돈 먹을 때 못 먹는 사람만 바보 되는 풍토에서 나만 깨끗할 수 있을까. 아니, 풍토 탓할 것도 없다. 기회를 못 만나서 그렇지 기회만 있었으면 이기적 유전자가 시키는 대로, 그들과 똑같이 즐거운 도덕적 해이의 향연을 벌였을 것 같다.
내가, 그들이, 특별히 양심불량자여서가 아니다. 인간은 백지상태로 태어나서 환경의 영향으로 착하게도, 악하게도 물들여진다는 이론은 옳지 않다는 것이 생물학적 지식과 함께 속속 밝혀지는 추세다.
지금 미국에서 화제로 떠오르고 있는 MIT대학 언어심리학자 스티븐 핀커 박사의 책 ‘백지 석판(The Blank Slate)’에 따르면 인간행동의 모든 것은 이미 유전자로 정해져 있다. 살아남으려면 무슨 짓이든 하는 것이 우리를 지배하는 유전자다. 속임수 증오 폭력과 지배는 서로 다른 유전자들끼리 이해관계가 부딪칠 때마다 항상 일어나는 일이므로 세상 말세라고 개탄할 것도 아니다. 나는 언제나 남보다 정직하고 현명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도 내 안의 유전자가 하는 일이다.
이 같은 유전자를 제어해온 것은 민주주의와 같은 제도와 이를 감시하는 사회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이젠 믿을 수 없게 됐다. 제도와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 역시 ‘그놈이 그놈’인 것을 모두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만 착하게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가 생긴다. 사람이든 동식물이든 한 개인의 최선의 전략은 그 집단의 대다수가 택한 전략이 무엇인가에 달려있는 법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정직할수록 돈을 못 번다는 사실은 최근 미국 미시간대학 조엘 스렘로드 교수팀이 학문적으로 입증해냈다. 이 대목에서 돈이 다냐고 해봤자 듣는 사람만 답답해진다. 착하고 미련하다는 평가나 받다가 일찌감치 퇴출당할 확률이 더 높다.
▼깨뜨린 쪽에서 먼저 나서라▼
내가 윤리교사라거나 공익광고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사필귀정 권선징악의 동화적 교훈을 되풀이할 것이다. 하지만 내 자식에게는 착하게 살라고 가르칠 자신은 없다. 차라리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속에선 필요와 이기심에 따라 전략적으로 움직여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전사의 정치학’을 일러주는 게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피곤한 전쟁에서 벗어날 방법은 신뢰를, 게임의 룰을, 법과 제도를 깨뜨린 자가 먼저 나서는 길밖에 없다. 다같이 또는 나부터 착하게 살자고 도덕성 회복 캠페인을 벌이자는 건 당신은 빠지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원인제공자 쪽에서 유전자의 훼방을 물리치고 몇 번이든 다시 모범을 보인다면 대중은 결국 돌아온다. 문제는 깨뜨린 자들이 과연 먼저 나설까 하는 점이지만.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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