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제성호/꼬리잘린 ´4900억´

  • 입력 2002년 9월 29일 18시 30분


7월 25일 북한의 서해교전 유감 표명 이후 남북 당국간에 각종 회담이 개최되고, 사회·문화교류행사가 이루어지면서 남북관계가 훈풍을 맞고 있다. 그간 북한측의 일방적인 회담 거부, 합의사항 이행지연 등으로 파행을 거듭해 온 남북관계가 정권 말기에 급작스럽게 복원되고 봇물 터지듯 교류가 급증하는 데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최근의 남북관계 진전이 혹시 우리측이 상당한 대가를 지불함에 따른 북한의 선물(?)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꾸준히 제기돼 왔던 게 사실이다.

▼´대북 뒷돈설´의혹 규명을▼

이런 상황에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전후하여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대출한 4900억원이 홍콩 내의 유령회사를 통해 북한에 건네진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일고 있다. 게다가 여기에 정부가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제보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는 등 사회적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최근 두 공영방송사가 평양에서 가진 공연 행사의 성사 대가로 각각 100만달러를 북한측에 헌금했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있다. 정경분리를 표방한 햇볕정책이 정경유착의 자기모순에 빠진 모습을 연출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또한 정권 말기에 ‘퍼주기’식의 대북 교류사업이 경쟁적으로 실시되고 있어 걱정이 앞선다.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햇볕정책은 납북자문제의 해결, 북한인권 개선 등에는 소극적이면서 파급효과가 미미한 일회성 이벤트에 치중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조급성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계속 북한측에 끌려가는 형국이다. 이웃 일본이 추진하는 냉정한 거래성의 대북 관계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동안 실시된 남북대화와 교류가 과다한 대북 뒷거래의 결과 성사된 것이라면,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다. 물론 남북교류를 추진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지원성 경비 지출은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교류 실현에 꼭 필요한 직접 경비에 국한돼야 하며, 또한 쌍방향의 교류를 촉진하기 위한 기반조성용으로 쓰여야 한다. 거기에도 당연히 국민이 수긍할 수 있는 적정한 선이 있는 법이다. 국민의 혈세를 쓸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많은 경비를 들여 북한에 가서 행사를 벌이면서도 애걸하듯이 막대한 뒷돈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행위는 국민 자존심에 상처를 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과다한 뒷거래 방식의 교류는 하지 않음만 못할 수도 있다. ‘뒷돈 있으면 교류 성사, 없으면 교류 불발’이라는 나쁜 선례를 남김으로써 북한에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교류 단가’를 높임으로써 차기 정권과 후발 대북 교류사업 추진자에게 상당한 정치·경제적 부담을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대다수 국민은 최소비용을 들여 상호 만족을 얻는 교류, 남북 쌍방향의 교류, 제도화를 통해 지속성을 갖는 교류가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대북 4억달러 수수설이 정치쟁점화하고 있는 지금 정부는 그간의 대북사업에 대해 국민이 갖고 있는 의혹을 말끔하게 해명할 책임이 있다. 금강산 관광사업 실현, 평양 남북정상회담 개최, 7·25 이후의 남북관계 원상회복 이면에 뒷거래가 있었는지 여부를 소상하게 밝혀야 한다.

▼남북기금 국회동의 필요▼

과다하게 뒷돈을 주는 관행과 되풀이되는 북한측의 무리한 현찰 요구는 밀실에서 소수정예의 엘리트들에 의해 대북정책이 결정되는 정치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균형있는 남북관계 운영과 정상적인 교류 정착을 위해서는 정부가 과거와 같은, 그늘에 가려진 대북정책 결정방식을 중단해야 한다. 특히 모든 남북교류에 투입된 돈의 사용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나아가 정책결정의 투명성 및 국민적 합의 확보 차원에서 대북정책의 중심을 행정부에서 국회로 옮겨가도록 하는 한편, 여·야간의 합의 하에 대북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남북협력기금의 사용도 국회의 동의를 얻어 실시하는 방향으로 법개정을 추진해야 한다. 대통령이 되려는 여러 공당의 후보들은 이 같은 정책노선을 대선공약으로 채택, 공식적으로 천명함으로써 정권적 차원이 아닌 민족적 국가적 차원의 올바른 대북정책을 추진해 주길 기대한다.

제성호 중앙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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