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연숙/미국교과서

  • 입력 2002년 9월 22일 18시 24분


영어가 세계어로 부상하면서 세계 인구의 절반가량이 영어를 안다고 한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영어공부에 비상이 걸린 지 이미 오래다. 올 상반기 한국 학생들의 유학 비용은 사상 최고(6억4000만달러)로 작년에 비해 62%나 증가했는데 유학생과 연수생 15만명(2001년 8월 말 기준) 중 3분의 2가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필리핀 등 영어권 국가에서 공부한다고 한다. 초·중·고교생의 조기유학도 갈수록 증가 추세에 있는 가운데 ‘따라만 해도 영어가 술술’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아이들은 저절로 익힌다’ ‘미친 영어’ 등 과장 광고에 모두들 갈피를 못 잡는, 이른바 ‘영어 전국(戰國)시대’를 맞고 있다.

▷며칠 전 신문에 ‘미국 교과서’로 가르치는 영어학원에 초등학생을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한 기사가 났었다. 미국 교과서로 배우면 우리 초등학생들도 미국인처럼 영어를 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일까? 미국 교과서가 가르치려는 내용의 목적과 우리 초등학생들이 배우려는 영어의 목적과는 큰 차이가 있다. 즉 미국 아이들은 영어를 이미 아니까 글만 익히면 되지만, 한국 아이들은 그들의 말을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이 말과 글을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언어습득의 네 가지 기술은 듣기-말하기-읽기-쓰기가 기본인데 언어를 배우는 것도 이 순서대로 하는 것이 순리다. 미국 어린이들은 동화나 역사이야기 등을 읽기만 하면 내용을 알 수 있지만 한국 아이들은 단어를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미국 교과서는 우리 초등학생에게 전혀 맞지 않으며 한국 아이들은 영어말을 배우는 교재를 사용해야 한다.

▷또 한 가지, 발음이 미국인과 같다고 해서 영어를 잘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영어를 잘하는 것과 발음이 좋은 것은 별개 문제다. 영어를 잘하는 것은 영어로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하는 것을 말하므로 발음에서 외국인 티가 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외교관이라면 오히려 그런 티를 내는 것이 자국의 자존심을 살리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세태를 좇아 무작정 조기유학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부모 떠나 외국에서 탈선하거나 우울증에 걸려 불행한 청소년 시절을 보내느니, 제 집에서 공부하면서 원만한 성격의 국제적 인물이 되도록 힘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홍연숙 객원 논설위원 한양대 명예교수·영어학 yshong333@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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