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영어가 계급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02년 9월 16일 18시 07분


또 영어학원에 등록을 했다. 영어라는 건 가사노동과 참 비슷해서 짜증스럽다. 공부를 할 때는 표가 안 나지만 그만두는 즉시 그나마의 실력도 뚝뚝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인다는 점에서다.
우리나라에서 직장생활하는 사람 치고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에게 영어로 인해 설움받고 고생한 얘기를 쓰라고 하면 저마다 삼국지다.
▼영어는 핵심인재의 관건▼
해외주재원 내정을 받아놓고도 사내에서 요구하는 영어점수가 모자라 사장 결재를 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 당연히 ‘먹는 자가 항상 먹는’ 현상이 나타난다. 영어가 되는 사람이 중요한 해외 출장은 물론, 가장 돈되는 부서에서 긴요한 역할을 도맡으며 앞서갈 수밖에 없다.
전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간주되는 세계화 시대, 암만 실력이 뛰어나도 영어를 모국어처럼 읽고 쓰고 듣고 말해야만 핵심 인재로 대우받는 세상이 된 것이다.
문제는 정부의 공교육만 믿고선 아무리 열심히 해도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힘들다는데 있다. 영어가 계급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어, 특히 영어회화를 잘해서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된 이들은 대체로 부모 잘 만나 영어권 국가에서 태어났든가, 어려서 외국생활을 한 계층에 속해 있다. 다 큰 뒤 외국서 학위를 받아온 사람이나 심지어 전문통역사들도 이들 해외파의 자연스러운 영어를 따라가기 쉽지 않다. 다행히 외국체류 중 2세를 낳아 길렀다면 이 같은 영어의 한은 대물림하지 않아도 된다.
‘깨친 엄마’들은 이런 판세를 체험적으로 안다. 초중고교생의 조기유학이 해마다 두세 배씩 폭증한다는 최근 보도가 말해주듯, ‘기러기 가족’을 감수하고라도 애들을 어릴 때 내보내는 절대적 이유는 영어라도 꽉 잡고 돌아오길 바라기 때문이다. 자식만은 자신과 다르게 살기를 원하는 엄마들은 일찌감치 영어 사교육에 돈을 퍼붓거나 직접 끼고 앉아 테이프를 들려준다. 초등학교에서 벌써 영어 꽤 한다는 아이는 중상류층 또는 시간과 교육자본이 넉넉한 엄마를 둔 소공녀 소공자들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그래서 필자가 주장하는 게 차라리 영어를 공용화하라는 거다. 공용화라는 말이 거슬리면 말레이시아처럼 교육언어나 중국처럼 업무언어라 해도 좋고 아예 ‘미운 말, 우리말처럼 하기 운동’이래도 상관없다. 개인의 인생은 물론 국가의 장래를 좌우하는 영어 습득을 부모의 능력 또는 개인적 비극으로 두지 말고 국가가 해결하라는 의미에서다.
영어 공용화에 반대하는 이들의 주된 논지는 첫째 민족혼이 말살된다, 둘째 계층간 갈등을 부추긴다, 셋째 필요한 사람만 각자 공부하면 될 일을 왜 전국민이 고생해야 하느냐 등으로 모아진다.
그러나 영어를 쓴다고 해서 우리말을 잊고 민족정신까지 사라지게 되리라는 생각은 일제강점기식 논리다. 그들에게 월드컵 경기 때 한국말 하나도 못하면서도 목청껏 한국팀을 응원했던 재미교포 2, 3세들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민족정기는 나라가 자랑스러울 때 절로 우러나는 것이지 영어난 때문에 한국에서 태어난 것을 한스러워하면서 생기는 게 아니다.
영어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 사이의 계층이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선 “국가에서 책임진다는데, 능력이 되는 자만 알아서 해야 하는 지금보다 더 하겠느냐”고 되묻고 싶다.
‘필요한 사람만…’의 주장을 달리 말하면 “영어를 무기로 세계 무대에서 돈버는 건 우리가 할 테니 당신들은 생업에나 종사하라”는 얘기다. 지금 영어를 필요로 하는 국민, 필요없는 국민이 따로 있지 않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선 꼬마 축구선수들도 영어를 익힌다. 선진국 프로팀에 진출하려면 영어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중국도 대도시에선 유치원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싱가포르는 초등학교부터 ‘영어로’ 교육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2007년까지 초중고교에 원어민 교사 5000명을 채용한다는 교육부의 계획도 예산을 못받아 무산됐다니 참으로 한가롭기 그지없다.
▼차라리 영어를 공용화하라▼
우리의 무대는 한반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만히 있으려 해도 우리 땅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영어로 우리를 고문하며 갈퀴로 이윤을 긁어 가는 형편이다. 미국과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를 우리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이 세계적 격랑 속에서 생존 또는 승리할 수 있는 핵심 경쟁력은 영어, 그 소리나는 단일 화폐다. 언어학자 로빈 레이코프가 저서 ‘언어 전쟁’에서 일갈했듯 언어는 현실을 규정하고 변형시키는 힘이고, 이 파워는 지금 영어가 갖고 있다.
더 이상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우리가 한국인의 자부심을 갖고 영어를 우리말처럼 할 수 있도록 이제 국가가 나서야 한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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