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순원/강릉의 두 부잣집

  • 입력 2002년 9월 12일 17시 57분


며칠 전 고향 강릉에 다녀왔다. 처음엔 폭우가 그친 다음날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날 고향에 내려가겠다고 말했을 때, 수십 번도 넘는 통화시도 끝에 겨우 전화가 연결된 형님이 이렇게 말했다.

“내려오면 당장 반갑기야 하겠지만 지금은 오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여기는 전기도 끊기고 물도 나오지 않아 멀리서 온 자식이며 동생한테 라면 한 그릇 끓여 대접하는 일도 여의치 않다. 아예 일주일쯤 내려와 일을 하고 올라갈 처지가 아니라면, 전기가 들어오고 물이라도 나올 때 내려왔다 가거라.”

▼고통도 나누면 반으로 준다▼

멀리 부산에 있는 친구 역시 그날 고향에 가려고 공항으로 나가던 길에 똑같은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곳은 지금 물 한 모금 아쉬운 판인데, 그런 경황에 찾아오는 자식의 고향 방문 역시 서울 높은 사람들의 일일시찰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였다.

인터넷 동창회 게시판에 올라온 수해 입은 마을 사진과 산사태로 목숨 잃은 친구의 어머니와 형님의 소식, 또 그런 참혹함을 당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발만 동동 구르다 전기와 전화가 복구되고, 물이 나온다는 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고향에 내려갔다. 아무리 그곳에서 나고 자랐어도 외지 번호판의 자동차를 타고 마을길을 나서기가 죄스러워 형님 자동차로 마을의 수해 현장 곳곳을 둘러보았다. 수해에 쓰러지고 갑자기 불어난 물에 휩쓸려 파손된 집들이 3분의 1이 넘었다. 마을에 들판은 하나도 없고, 그 자리가 토사에 휩쓸려 물 빠진 한강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까운 친척들말고는 동네 어른들을 보고도 객지에 나가 사는 것조차 죄스러워 위로의 인사조차 제대로 드릴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며칠째 군인들이 들어와 마을길을 복구하고, 수해를 입은 집 주변 정리를 하고 있었다. 형님은 이런 일이 있을 때 군인들과 119요원, 자원봉사자들이 아니면 몇 달이 걸려도 복구가 쉽지 않을 거라며, 정치를 하는 사람들과 관청의 높은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일이 있을 때 현장에 나온 군인이나 119요원 한 사람 몫의 감동만 주어도 사람들 마음의 상처가 크게 위로되었을 거라는 얘기를 했다. 시찰 나온 사람들은 외출복보다 더 산뜻하게 주름을 잡은 민방위 작업복을 입고 와 사진만 찍고 갔다고 했다.

나 역시 몇 장의 담요와 약간의 현금봉투로 ‘일일시찰’을 마치고 오후에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동네 어른들이 말하던 66년 전 강릉 지역을 휩쓸고 지나갔다는 ‘병자년 포락(浦落)’의 뒷얘기를 생각했다. 그때는 이보다 비가 덜 왔는데도 강릉지역에서 1000명, 양양지역에서 600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그해 포락 뒤 강릉의 한 부잣집은 하루 세 끼 식사를 아침저녁 두 끼로 줄이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였다. 그러나 다른 한 집안은 수해 후에도 그때 시세로 그것 천 마리면 고래등같은 기와집 한 채 값이라는 임연수어를 때마다 구워 식구들마다 그 껍질로 밥을 싸 먹었다고 했다. 그래서 수십년 동안 그 지역 어른들은 감기가 걸리면 그쪽을 향해 기침을 하며 “이 감기, 저 집에나 들어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집이 어느 집안이냐고 묻지 않았다. 후에 일제강점기에 비행기를 헌납하고, 일본 왕실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여전히 출세해 이런 수해 때면 외출복보다 더 산뜻하게 줄을 잡은 민방위복을 입고 수해 현장에 나가 사진을 찍는다.

그런 역사까지는 말하지 않겠다. 사실은 곧 다가오는 추석 명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대충은 그럴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추석 선물용 굴비 한 세트가 100만원이 훨씬 넘는 것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내가 다시 떠올린 것 역시 ‘병자년 포락’의 뒷얘기였다. 1000만원이나 되는 양주도 선을 보였다고 한다.

▼이번 추석만큼은 검소하게▼

그런 얘기를 듣는 동안 강릉 어느 집안의 임연수어 얘기와, 폭우에 휩쓸리고 허물어진 집 옆에 임시로 텐트를 치고 명절을 보내야 하는 고향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역시 내가 세상을 너무 삐딱하게 보기 때문일까. 수해를 입은 고장의 당사자로서 그런 선물값으로 수재의연금 운운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인 줄은 나도 안다. 그러나 병자년 포락 때 하루 두 끼로 식사를 줄이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인 강릉 어느 집안의 미덕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정말 이번 추석만큼은 집 없이 나앉은 수재민들을 생각해서라도 다들 검소하게, 또 알뜰하게 보냈으면 싶다. 그것이 바로 베풀지 않아도 베푸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을 덮는 따뜻한 이불이 될 것이다.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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